입력 : 2019.07.22 09:49
다가오는 10월(2019. 10. 17 ~ 2020. 02. 09)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임영균 사진작가의 기록과 술회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 행보와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의 비디오아트 회고전
1982년 4월 29일 금요일 저녁,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회고전 프리뷰가 있었다. 나는 백남준의 초청으로 역사적인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당시 뉴욕 예술계 풍문에 의하면 해당 전시는 백남준의 건강이 좋지 않아 죽기 전 열리는 마지막 전시가 될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 휘트니 미술관에서는 미국 국적이 아닌 외국인 작가가 전시를 가진 적이 없었으며 더구나 살아있는 작가의 회고전은 열린 사례가 없었다.
미술관 입구에는 백남준이 1950년대 서울을 떠났을 때 사용했던 낡은 대한민국 여권, 작은 공책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깨알 같은 손글씨가 담긴 노트 몇 권, 한복을 입고 찍은 가족사진, 예전에 사용한 가죽 지갑 등 옛 소지품들이 목재로 만든 낮은 유리 진열장 속에 마치 박물관의 화석처럼 진열돼 있었다. 흡사 고인의 유품을 보는 것 같았다. 특히 1950년 도장이 찍힌 낡은 여권 속의 빛바랜 흑백사진의 백남준은 여리고 감성적으로 보여 젊은 예술가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 더욱더 슬프게 보였다.
전시장 입구 상단에는 대형 흑백 고딕체로 ‘NAM JUNE PAIK’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길게 직렬 설치된 20대의 TV 모니터에서는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이 연출한 빠르고도 절제된 동작과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대각선으로 비상하는 장면, 열대어들이 수초 사이로 노니는 모습을 배경으로 한 실제 어항들이 설치돼 있었다. 의도적으로 연출된 어두운 실내 분위기에 모니터 불빛에 반사된 영상의 형광빛 열대어들은 끊임없이 수초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Videio Fish>를 감상하는 관객은 바닷속에 있는 듯한 초현실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날 개막 행사에는 미술관장 톰 암스트롱의 인사와 전시기획을 담당한 존 하르나트가 백남준 전시의 목적을 설명했다. 백남준은 1964년 뉴욕에 정착해 지난 20년간 미국에서 작곡가, 연주자, 화가, 공연예술가로 활동했으며, 무엇보다도 비디오가 새로운 아트 폼이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제일 중요한 업적은 텔레비전과 새로운 비디오 조작기술을 개발해 뉴욕 현대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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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비디오 전시 그리고 휴먼첼로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백남준의 전시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은 세계 최초의 비디오예술 전시로 소개됐다. 백남준은 13대의 중고 텔레비전과 피아노 3대를 구입해 텔레비전 화면과 피아노의 소리 나는 기능을 변형했다. 예컨대 각각의 텔레비전에서는 회로를 조작해 모니터에 정상적인 이미지가 나오지 않고 회오리 같은 영상이나 점과 선의 불협화음의 영상이 나오게 했고, 심지어 어떤 텔레비전은 아예 화면을 볼 수 없게끔 모니터를 바닥으로 향하게 놓았다. 3대의 피아노 작품인 <준비된 피아노>에서는 한술 더 떴다. 피아노의 내부를 해체해 건반과 페달이 연결된 와이어를 절단하고 밖으로 드러내 마치 동물의 창자가 나온 것처럼 흉측스럽게 만들었다. 피아노 건반에는 찌그러지고 녹슨 깡통, 때 묻고 낡은 브라, 깨진 달걀껍데기, 오래된 그림엽서 등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듯한 쓸모없는 물건들을 잔뜩 올려놓았다.
이는 사람의 정보는 청각보다 시각이 훨씬 중요하다는 백남준의 평소 지론이 반영된 것으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을 만든 셈이다. 큐레이터 하르나트는 만약 백남준이 1960년대 뉴욕에 정착하지 않고, 독일에 그대로 있었다면 뉴욕은 비디오 예술의 선두주자를 독일에 빼앗겼을 거라며 뉴욕으로 이주해준 백남준에게 고마움과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어 소개를 받은 백남준이 나와 전시작품과 공연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겨진 흰색 와이셔츠에 양복 상의를 입고 나와 특유의 어눌한 일본식 영어발음으로 본인 작품을 ‘마스터 피스’ ‘월드 프리미어’라고 부르며 작품 제작 계기를 밝혔다. 백남준의 거친 영어발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객과 소통이 잘 된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백남준은 오랜 예술적 동료인 샬롯 무어먼을 소개했다. 검정 드레스차림의 무어먼이 등장하자 관객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무대에 오른 그녀는 스스럼없이 드레스를 갈아입고서는 가슴에 작은 TV 화면을 장착했다. 첼로모양의 TV 화면 3대에 연결된 현에 활을 문대며 백남준이 편곡한 생상스의 변주곡을 연주했다. 연주를 끝낸 뒤 무어먼은 “오늘은 첼로가 세상에 태어난 지 400년 만에 백남준이 혁명을 일으킨 역사적인 날”이라고 입을 뗐다. 그러면서 “휴먼첼로(인간첼로)인 백남준의 몸에서는 과연 어떤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여 달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무어먼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남준은 상의를 훌훌 벗고 무어먼의 품속으로 안겼다. 인간첼로로 분한 백남준은 그녀의 품에 편안히 안긴 채 오른손에는 첼로 현을 잡았다. 무어먼은 백남준의 벌거벗은 등과 목을 두 손으로 껴안고서는 인간첼로의 등에 연결된 현에 활을 문질렀다. 이때 스피커에서는 아름다운 소리라기보다는 끽끽거리는 불협화음의 전자소리만이 들렸다. 그러나 무어먼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장난스럽게 현으로 백남준의 등을 튕기거나 활대로 등을 북처럼 퉁퉁 쳐댔다. 관객들은 끽끽거리는 잡음에 동요하지 않고 도리어 즐거워하며, 백남준이 세계 최초의 인간첼로가 된 것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백남준과 샬롯 무어먼의 인간첼로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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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균은 1982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만난 이후, 그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함께하며 20년간 예술가로서의 동반을 이어갔다. 백남준은 임영균의 작업에 대해 “예술사진이란,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의 의도(意圖)다. 임영균은 그런 시도에 있어서 한국의 기수 중 하나”라고 평한 바 있다.
전국학생사진전최고상(1973), 스미소니언박물관 큐레이터 메리 포레스터 선정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1985) 등을 수상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초대전(2007)을 비롯해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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