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실재인가 가상인가”

  • 아트조선 윤다함 기자

입력 : 2019.07.05 17:41

[찰리한 계명대 영상애니메이션과 교수]
디지털로 조작해 실재와 가상, 한 화면에 병치… 최신작 ‘On & Off’
이길이구갤러리 초대전 ‘Vice Versa’ 20일까지

 
“실재(實在)로 인식되는 가상, 즉 ‘시뮬라크르’가 현실에 공존한다는 건 이미 공공연하죠. 그러나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기능하고 우리는 그게 마치 진짜 현실세계인 듯 반응하고 있다는 실정은 정작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실재가 더는 실재로서 작동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기는 ‘시뮬라시옹’ 사회가 된 것은 아닐까요.”
 
시뮬라크르(Simulacre)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혹은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대체물을 뜻한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체제와 미디어의 발달은 많은 이미지를 복제하고 소비중심의 사회로 이끌었고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 실재와 가상, 본질과 현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왔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발달과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현대사회는 사물의 유일성을 보여주는 ‘원본 정신’보다 실재보다 더욱 강력한 실재성을 지닌 가상, 다시 말해 시뮬라크르 속에 매몰돼 있다고 찰리한(46) 계명대 영상애니메이션과 교수는 지적한다.
 
< On & Off - Tulips >(Still) 1’20” Single Channel Video, Color, Sound 2019 /이길이구갤러리
 
작가는 현실의 실제를 지배하는 가상의 역할이 현실을 제어하는 단계로 확장되는 것에 주목하며 가상의 것들이 실재를 규정하려는 오류를 꼬집는다. 그는 일상적인 풍경에 현실을 은유하는 알레고리적 장치를 심고 착시를 위한 디지털 조작을 통해 실제 공간 위에 가상의 선·면·도형 이미지를 현실의 영역에 개입한다. 최신작 <On & Off>는 바람(움직임)과 그림자(부동)를 통해 가상과 현실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영상작업이다. 갈대와 꽃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지만 그림자는 박제된 듯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자연현상이지만, 인위적으로 그림자를 정지킴으로써 분리되지 않은 실재와 가상을 한 화면에 병치했다. 
 
“보통 실재와 가상, 이 둘을 정반대 개념으로 보지만, 사실 둘을 구별하는 것은 제게 무의미해요. 요즘 세상을 보면 현실에서도 가상적인 게 많고, 가공적인 것이 어느새 현실이 돼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잖아요? 제 영상 속에서 빛, 바람, 중력 등 자연현상은 실재 요소이자 현실을 대변하는 요소죠. 그런데 그 자연적 요소 일부를 가공해 실재와 가상을 공존시킴으로써 현실 세계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 On & Off - Tree I >(Still) 2’15” Single Channel Video 2019 /이길이구갤러리
 
전시타이틀 ‘Vice Versa’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Vice Versa’는 문장 뒤에 쓰여 ‘앞문장의 반대도 마찬가지’란 뜻의 라틴어 문구다. 실재에 대한 가상의 주도적 지배성과 반대로 가상성에 의해 실재가 뚜렷해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관계성을 나타낸다. “이 문장 자체가 중립적인 표현이잖아요. 이를 제목으로 사용해 관객에게 약간의 단서를 줬다고나 할까요. 그 정도의 역할이지, 이번 전시의 모든 걸 담고 있다고는 오해 마세요. 그저 관객의 자유로운 의견을 유도하길 바랄 뿐이에요.”
 
사진, 영상, 설치 작업 등을 통해 정체성, 공간성, 문화성에 대한 이슈에 관심을 두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온 찰리한이 개인전 <Vice Versa>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시뮬라시옹 시대의 실재와 가상에 대한 알레고리적 변주를 보여주는 작업을 내건다. 작가는 인터뷰 말미에 한마디 덧붙였다. “작품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단 작품을 통해 파생되는 이야기에 더 큰 가치를 둬요 그래서 미술을 ‘매체’라고 하는 것 같아요. 작품을 마주한 이들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니까요. 작품 앞에서 정답은 없으니 쉽게 생각하세요!” 20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이길이구갤러리(2GIL29 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