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6.25 18:00
“자연 풍화 흔적에 최소한만 개입해야 예술 되는 것”
10년간 지붕에 널어놓은 광목천 작업 등 20점 선봬
개인전 ‘Le Temps’, 7월 14일까지 가나아트센터
포개놓은 나뭇조각을 들추자 색(色)이 나타난다. 10년간 종이가 태양빛에 탈색되고 천이 비바람에 닳을 때, 그 종이와 천을 꾸욱 눌러줬을 나뭇조각은 자신의 아래 10년 전 그들의 본디 색깔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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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실존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온 안종대(62)는 캔버스에 그리는 대신 양철지붕이나 정원에 천을 널어놓고, 붓질 대신 비바람에 헤진 천을 꿰매는 작가다. 천, 종이, 쇠, 나무, 말린 식물 등 일상적인 오브제를 풍화에 노출시킴으로써 실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그 변화의 편린을 작업으로 엮어 실상의 개념을 구현해왔다. 오브제의 자연적인 풍화를 이용하는 작업인 만큼 기다림의 시간도 길다. 작업 하나에도 짧게는 몇 년, 대개는 수십 년에 걸쳐 이어오고 있다.
나무, 접시조각, 돌멩이 등 쉽게 마주치는 일상적인 것들을 오브제로 삼는다. 이를 활용해 작품으로 제작하기도 하지만, 캔버스 천이나 색지를 야외에 펼쳐 놓을 때 누름쇠 용도로 사용될 때야말로 오브제의 본 역할이 빛난다. 긴긴 시간, 오브제는 천과 종이를 누르고 지키며 작품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색지 위에 놓인 깨진 그릇이 햇빛을 가려 탈색된 종이 위에 말간 흔적을 남기거나, 캔버스 천 위의 나무가 빗물이 지나간 자리를 얼룩으로 남기는 식이다.
안종대는 파리국립미술학교 회화과 졸업 후,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프랑스 화단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는 무언가를 그리고 표현하는 것이 무상하고 허무해졌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관한 회의가 들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음, 시간, 사랑을 그려내고 싶었지만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괜히 역정이 나 캔버스 짜려고 놔둔 천들을 마구 꾸기거나 그 위에 물을 뿌려버렸어요. 어느 날 그렇게 방치해둔 천들을 봤는데, 물자국, 빛바랜 흔적, 얼룩… 그토록 찾던 아름다움을 드디어 발견한 거예요.” 당시 시장 반응이 좋았던 추상화를 그만두고 현재 작업에 이른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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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작업실 양철지붕에 10년간 올려놨던 작업의 화면에는 얼룩덜룩한 빗자국 말고도 검은 점이나 페인트자국 따위가 보인다. 자연의 흔적에 작가의 손길을 더한 것이다. “이 검은 점은 우주의 중심, 균형을 뜻합니다. 이 점이 없다면 이건(작품) 걸레와 다를 바 없겠죠.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명백하지만, 자연 그대로는 원시일 뿐,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야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걸레냐 예술품이냐를 가르는 건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이에요. 이를테면 이 점과 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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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직접 염색하는데, 미묘하게 달라 서로 같은 색은 없다. 그러나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창가에 3년만 두면 대부분 색이 날아가 순백색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진정 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인 거죠. 종이일지라도 마치 생명처럼 하루하루 변해가요. 나이 먹어 연륜이 생기듯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 빛깔의 깊이가 깊어지죠.” 변색되거나 혹은 썩거나 사라지는 게 아닌, 발효돼 나타나는 것이라고 안종대는 말한다. 나무나 쇳조각, 태양의 열기와 빛, 빗물과 이슬, 흙의 얼룩들, 이들은 음양오행의 원소들로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서로 영향을 미치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매 순간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작업이 품고 있는 축적된 시간은 낡음이라기보다는 숙성에 가까운 셈이다.
만물을 변화시키는 시간의 흐름 안에 절대적이고 완결된 상태의 실체(實體)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축적된 시간의 흔적을 어느 한 순간의 상(像)으로서 목격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즉, 눈에 보이는 실상은 결국 허상(虛像)이며 그에게 있어서 실상은 시간과 밀접한 개념인 것이다. 모든 작품명에 ‘실상(實相)’과 불어로 ‘Le Réel(실상)’과 ‘Le Temps(시간)’을 병기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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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대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오브제를 활용해 평면, 입체, 설치 등 다양한 장르로 작업한 실상(實相) 연작이 공개됐다. 개인전 ‘Le Temps’에서는 숨김과 드러남의 미학을 통해 실체의 허상을 역설하는 색지 작업, 비바람과 흙먼지, 물의 흐름이 빚어낸 공간감적인 작업 등 20여 점이 내걸렸다. 이번 전시는 7월 14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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