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실재, 그 매끄러운 경계를 탐닉하다

  • 아트조선 윤다함 기자

입력 : 2019.06.05 19:42

정희민, ‘디지털 이미지’ 소재로 촉각의 결핍에 주목…
‘An Angel Whispers’展, 30일까지 P21

<바다가 된 개의 초상> 182x182cm Oil and Acrylic on Canvas 2019 /P21
 
디지털 환경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특성과 이를 경험하는 방식을 고민해온 정희민(32)은 전통적인 매체인 회화의 고정된 화면을 통해 새로운 감각이 서로 만나고 어긋나거나 충돌하는 지점에 주목해왔다. 특히 쉽게 휘발하는 디지털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이를 소재로 삼아 회화, 영상 등을 매개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스크린 속 이미지는 점점 실감 나는 존재감을 갖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미디어는 이미지가 얼마나 진짜 같은지 뽐내기라도 하는 듯 대상의 생동감과 표피를 실감 나게 모방해낸다. 그러나 그럴수록 촉각적 경험은 결여돼 간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유리 액정을 더듬는 행위만이 우리가 스크린 속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또렷한 디지털 이미지와 한정된 경험 방식의 간극에서 오는 감각의 낙차와 촉각에 대한 욕구를 탐구하고자 한다. 
 
정희민 개인전 ‘An Angel Whispers’가 30일까지 서울 이태원동 P21에서 열린다.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구현한 가상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아크릴과 오일, 미디엄을 다양하게 혼합 사용해 실재와 가상이 이질적으로 혼재하는 화면의 최신작을 내걸었다. 스크린 기술이 진화되면서 점차 누락돼 가는 촉각이란 원초적인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웹 그래픽적 시각 언어와 질료의 질감과 양감을 중첩시켜 화면에 매끄럽게 드러냈다.
 
(왼쪽부터)<어제 밤에 만난 개> <창에 맺힌 것 1> <창에 맺힌 것 2>(2019) /P21
 
이번 전시를 기획한 장혜정 큐레이터는 작가의 화두는 이질감이라고 설명했다. “스마트폰 스크린 속의 세상은 가상임에도, 때론 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하잖아요. 그러나 액정이 깨지거나 액정 위로 물방울이라도 떨어지는 순간, 실재와 가상 간의 경계가 명확해지며 스크린 속 세상이 완벽히 가상임을 인지하게 되죠.” 정희민은 스크린 뒤의 납작하고 판판한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화면 위에 미디엄을 올렸다. 미디엄은 주로 물감에 섞어 안료를 화면에 고착하거나 접착할 때 쓰이는 투명한 물질이다. 작가는 미디엄을 액정 위의 물방울과 같이 이용한 셈이다.
 
그의 화면에는 뚜렷한 형태 없이 흘러내리거나 덩어리진 물감이 난무하고 휘갈겨 쓴 텍스트가 가득하다. 이미지를 배경으로 밀어내고 화면을 가득 메워 실체 없이 이름만으로 공허하게 존재하는 가상 세계를 호출해낸다.
 
영영 봉인된 듯 납작하게 압착된 사과는 작가의 단골 소재 중 하나. 꼭 미술인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화병 옆 사과를 그려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사과는 정물화의 기본 정물로 꼽힌다. 이처럼 대중적인 정물을 차용함으로써 관람객의 감각, 즉 감상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기 위한 의도다. 즉, 작가가 회화를 어떻게 보여주고 이를 관람객이 어떻게 사유하느냐가 중요하지, 이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한편, 작가는 현재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해 있으며, 오는 20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하는 ‘젊은모색 2019 : 액체 유리 바다’에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