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5.24 16:57
안경수, 어둠과 빛으로 폐허 그려내
개인전, 6월 22일까지 피비갤러리
안경수(44)는 사람이 없는 버려진 풍경의 경계를 포착한다. 잉여의 존재 혹은 사람이 없는 장소나 외곽지역의 공장, 컨테이너 박스 따위에 관심을 갖고 이를 캔버스로 불러낸다. 흔히 지나치는 풍경과 사물이지만 역설적으로 보는 이는 일상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이거나 현실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다가오진 않기 때문. 도시 풍경과 사라진 주거지, 재개발로 곧 생겨날 건물들 사이에서 시간은 정지되는 듯하다. 이곳에서 인간은 존재하지도, 또한 존재할 필요도 없다. 그저 빈 공간에 무언가 존재했던 흔적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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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릴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린 그의 화면이 오일페인팅처럼 농밀한 밀도감을 보여주면서도 그 표면은 얇고 매끈하다. 작가에게 회화라는 장르는 의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장치이자 회화 자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작업 초창기에는 동양화 성격이 묻어나는 드로잉 작품을 주로 했다면, 캔버스 작업에 착수한 뒤부터는 빠르게 마르고 덧대기 쉬운 아크릴의 특성을 활용한 단순한 색과 비물질적인 선으로 구성해, 즉 막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 작가는 종이와 캔버스를 오가길 반복하며 동양화적인 속성과 오일페인팅의 무게감을 아크릴을 통해 구현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됐다고 한다. 아크릴 위에 덧바르고 말려서 또다시 덧칠하는 과정은 층을 구현하는 노하우를 배운 계기가 됐고 이때부터 안경수의 화면은 수 겹의 층과 막으로 이뤄지게 됐다.
이후 작업에서는 자본주의와 재개발, 그것이 야기하는 인공적인 풍경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했다. 2012년부터는 좀 더 일상적인 풍경과 내면의 리얼리티로 관심을 옮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겹겹의 기억과 경험을 사물에 관계해 흐릿한 감정을 드러내는 데 몰두했다. 작가 자신의 감각만으로 주변 세계를 내면화해 온갖 정물과 지물들, 쓰레기들을 뒤섞어 복잡하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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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요란한 밤>은 안경수의 최근 작업에서는 나타나는 변화 양상에 주목한다. 전시 타이틀은 밤이 연상하는 시각적 이미지에 모순적으로 덧입혀진 요란하다는 청각 작용을 빗대어 작가의 메시지를 암시한다. 또한 2017년 제작한 그의 회화와 동명이기도 하다.
폐허와 빛,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은 신작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낮에서 밤으로 건너가는 어느 지점에서 어슴푸레하지만 분명한 빛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공터나 폐허와 같은 곳에서 빛이 홀로 존재하는 모호함이 기이한 낯섦을 불러일으킨다. 석양과 노을 외에도 그는 인위적인 조명을 사용해 빛과 어둠을 강렬하게 대비한다. <비밀 연소> <트럭>에서 비밀스러운 집회를 먼발치에서 목도하는 자의 심경을 대변하고 동시에 연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안경수의 변모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사물 그 자체를 향한 직관적인 관심이다. 실제로 얼마 전부터 일상생활에서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는 확성기, 전등 같은 물건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포토리얼리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사물 자체가 가진 질감과 표면에 대한 기록이자 작가 고유의 해석에 가깝다. 사진을 레퍼런스로 삼아 물결이 흘러가는 모습, 눈이 오는 장면, 가로등 불빛 아래 모여든 나방의 무리를 그리기도 하는데, 이때 역시 빛과 어둠의 작용을 영리한 방식으로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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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것들, 혹은 보려고 하지 않는 것들에 주목해온 안경수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층 세밀해진 주제와 시각으로 또 다른 전환점을 향한 시도를 보여준다. 지금껏 그의 회화가 막과 풍경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주변을 관찰하고 기록해왔다고 한다면, 최신작에서는 그리는 행위와 화면에 대한 오랜 응시 그리고 캔버스를 대하는 스스로의 태도에 더욱 집중하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6월 22일까지 서울 삼청동 피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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