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4.30 20:33
[인터뷰] 사진작가 민병헌
아날로그 고집 40년 “내 손끝 거쳐야만 온전히 내 작업”
컬러·디지털 작업 유혹에 “돈도 좋지만 아직은 초심 상기할 때”
거처 옮기고 작품에 변화… 미묘한 중간톤에서 또렷해진 콘트라스트
‘이끼’展 5월 18일까지 한미사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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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적막한 어딘가를 거니는 듯한 형상이 보이다가 일순 사라진다. 흑과 백 사이 어느 지점의 명료하지 않은 색채가 한 바퀴 휘감고 지나간 민병헌(64)의 모노톤 화면을 마주하고 있자니 정확히 짚어내기 어려운 상념 따위가 들다 이내 정적에 갇힌다.
인터뷰를 위해 작가가 머물고 있는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면서 괜스레 걱정이 들었다. 작품처럼 작가도 말없이 조용한 사람이면 어쩌려나. 기자 입장에서 과묵한 인터뷰이만큼 고역이 없다. 대화가 서로 핑퐁 되지 않는 이와 이야기를 이어간다는 게 얼마나 어색할지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실제 모습은 상상과 판이했다. “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어요. 외모와 작품이 매칭이 안 된다고. 작품만 보면 개량한복 걸친 채 차 홀짝이고 있을 것 같다나요?” 이날 만난 민병헌은 청바지에 흰 컨버스를 멋스럽게 구겨 신어 흡사 믹 재거를 연상하는 스타일리시한 차림이었다. 솔직하고 자유로웠으며 유머러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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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폭포, 설원, 잡초, 안개 등 자연을 피사체로 삼아왔다. 잔잔한 안개 낀 새벽에 풀들이 기어 올라오는 모습 같이 지천에 널리거나 혹은 쉽게 지나칠 법한 풍경을 담아 아렴풋한 모노톤, 이른바 ‘민병헌 그레이(Gray)’라는 독자적인 톤을 구현해 국내외에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초보 시절, 수학공식마냥 이런 말 많이 들었죠. ‘사진은 맑은 날 오후 2시에 셔터스피드를 120, F값은 최대에 두고 찍어라.’ 왜? 그래야 쨍하니까. 근데 혼자 암실에 며칠이고 박혀 있어보니 흑백 사진이 꼭 콘트라스트가 강해야만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죠. 그래서 공식과는 반대로 제 사진은 자꾸 흐려졌어요. 이건 제 손으로 직접 작업하지 않으면 절대 못 느꼈을 거예요. 촬영, 인화, 프린트까지 온전히 저 혼자만의 작업이니까요. 아니면 그런 기분은 나오지 않았을 테죠.”
그가 사진을 ‘찍는다’가 아닌 ‘한다’라고 말하는 이유다. 찍는 행위는 사진하는 과정의 일부고 더 중요한 단계는 현상과 인화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과정은 오롯이 제 손으로 혼자 해야 합니다. 촬영 나갈 때도, 암실 들어갈 때도.” 작가는 혼자 무언가를 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혼자 있다는 것은 그만큼 홀로 공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뜻이죠. 꼭 작업하지 않더라도 정원에서 호미질을 하든 음악을 듣든 혼자 대상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그 자체가 저에겐 양분과도 같아요.”
이렇게 해온지 40년이다. 촬영도 현상도 인화도 모두 홀로, 그것도 아날로그로 ‘지루하게’ 작업해온지. “진부한가요? 구태의연해 보일 수 있겠죠. 세상은 이리도 많이 바뀌었는데, 이 지루한 걸 변함없이 해온다는 게…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저 역시 딴 마음 많이 먹어봤어요. 디지털로 해봐라, 컬러로 해봐라 주위의 참견도 수없이 겪어봤죠. 그런데 그렇게 한번 옆길로 새어나간 후, ‘그 다음엔?’ 스스로 되묻게 되더군요. 샛길로 빠지길 반복하다간 결국 제 본모습을 잃어버릴 거라고요. 한 번 발을 들이면 솔직히 그 다음날부턴 암실에 안 들어가게 될 것 같았거든요.” 눈이 빠질 것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리 허리가 아프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아도 민병헌이 여전히 암실을 들어가는 연유다. 흑백 사진이 더 예술적이고 대단해서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눈으로 느끼고 본인의 손끝으로 직접 마무리해야만 온전히 자기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나란 사람이니까요. 내 손을 떠나면 그건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애초에 사진을 하고 싶었던 거고,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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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스트가 강하지 않은 특유의 잔잔한 회색톤이 시그니처였지만 근래 들어선 비교적 대비가 또렷해졌다. 환경 변화 덕분이란다. 그는 20년 가까이 작업하며 지냈던 양평 생활을 정리하고 2015년 군산으로 내려왔다. 볕이 좋은 곳에 살다보니 작품도 변했다. 흐린 날에만 카메라를 들던 습관 대신 요즘엔 화창한 날 촬영에 나선다.
여행길에 올랐던 2014년 우연히 마주친 이 공간은 앞뒤 재지 않고 군산행을 택하게 한 동인(動因)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아 10년 이상 방치돼 풀숲에 뒤덮여있던 그곳은 당시 사람 살 곳으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첫눈에 매료됐다. 고즈넉한 동네 분위기는 어릴 적 추억과 향수에 잠기게 했고 마치 지난 시간 속에 머물러있는 것 같았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100년가량 된 일본식 양옥으로 생김새와 규모로 미뤄보아 그 당시 고위직이나 부호가 살았을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어느 누구도 수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단다. 그만큼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우리 마누라가 대문 앞에서 안 들어오더라니까, 무섭다고… 꼭 블랙홀처럼 사람 기(氣)를 빨아들이는 그런 느낌이었달까요. 처음에 담 너머로 안을 보는데 풀이 하도 우거져 시커멓게 어두웠으니.” 그는 목공을 자처해 그곳을 손수 고치고 탈바꿈하느라 1년을 꼬박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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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특색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작품 얘기가 아니라 집 이야기만 나오는 것 같아 못마땅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나조차도 지금 집 얘기만 하고 있네요.(웃음)” 못마땅하더라도 집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작가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겪고 보고 생각한 게 작품에 드러나는 법이다. “1990년대 말부터 양평 서종에 계곡 깊숙한 데 들어가 살았는데, 산중이니 조용할 것 같죠? 오히려 서울보다도 더 아수라장이었어요. 줄지은 카페들, 그곳에 몰린 인파… 말도 못해요. 그런데 이곳은 도심이지만 저녁엔 차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요. 우리 집 찾아온 손님들이 하룻밤 머물다갈라치면 물어보는 게 있어요. 밤 되면 이리 으슥한데 안 무섭냐고요. 그런 생각하면 못살아요. 양평 있을 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한 걸요. 그래서인지 사실 요즘 작업이 잘 안 돼.”
뜻밖의 고백 뒤 작가가 마구 웃어 젖혔다. 군산으로 내려오기 전엔 항상 긴장한 채로 살았다고 했다. 누가 뒤에서 뒷덜미를 잡고 끌어당기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스스로 조이고 졸라맸다고 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터 탓일까요? 여기 내려온 뒤로 게을러지고 느슨해진 걸 느끼죠.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예요. 오죽하면 이곳 와서 살이 엄청 쪘어요. 건강이 좋아진 것은 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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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헌이 군산에 내려가 2017~2018년 작업한 사진을 5월 18일까지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 내건다. 돌과 나무에 바짝 엎드려 있는 이끼를 찍은 사진들이다. 강렬한 태양빛이 드리운 때 물기를 품고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축축하고 끈적한 이끼의 존재감, 그리고 이를 키워낸 음습한 땅의 디테일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왜 하필 이끼였냐는 질문에 작가는 일갈했다. “그렇게 따지면 왜 하필 안개였냐, 왜 하필 폭포였냐… 끝이 없어요. 내겐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물론 깊게 들어가면 작은 동기가 있었을지 몰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궁극적으로 어떤 주제든 그 시작은 내게 다 똑같아요.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건 내 심리상태에 따라 달렸죠. 그에 대한 차이일 뿐이에요. 이를테면 사랑하는 여자라도 어떤 날은 굉장히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어떤 날은 꼴 보기 싫은 날이 있을 수 있잖아요? 싸웠을 수도 있고 여자가 머리를 안 감았을 수도 있고. 즉, 같은 대상이라도 하나의 모습만 띠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 심리상태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 보이죠. 그리고 이게 바로 사진의 본질이고요.”
카메라와 사진이 발명된 이래, 지금껏 사람이 단 한 번도 찍지 않은 대상이 존재할까. 사람 몸속, 머릿속, 우주까지 찍는 세상인데. 아무도 촬영하지 않은 피사체를 쫓아다닐 게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냐가 관건이라고 작가는 강조했다.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도 다른 사람과 나의 시각이 같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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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부리기를 즐기는 작가는 작품과 돈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저도 예쁘고 멋진 것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한 생활인인 것은 당연한 거고요. 그럼에도, 그럼에도… 넘어가지 말아야할 경계를 스스로 정해야겠다고 다짐했고 아직까지 이를 어긴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란 말은 ‘오늘까지’라는 뜻이기도 해요. 언젠간 바뀔 수 있으니까요. 다만 하루라도 더 늦게 바뀌고 싶은 거죠. 아무도 내 작품 안 쳐다봐준대도 내가 뭐가 좋아서 사진을 시작했는지 잊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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