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Art] “인생처럼 작품에도 완성이 없는 법”

  • 아트조선 윤다함 기자

입력 : 2019.04.26 16:44

‘103세’ 김병기, 코끝 찡해질 때 “미완이 완성되는 순간”
“색채에 대한 욕망 인다” 노랑, 빨강 등 강렬한 색감 신작
‘현역 면모 과시… ‘여기, 지금’展 5월 12일까지 가나아트센터
 

“마음이 쇠약함을 느낀다. 그러나 약할 때일수록 능력은 더 강해지리라. 약한 자를 돕는 하나님의 힘을 믿는다.” 독실한 교인인 김병기(103) 화백이 ‘고작’ 그림 몇 점 내들고 전람회 여는 것에 대해 “마음이 약하다”라고 말했다. 한편으론 “100세 넘어 전시 여는 사례는 전 세계 미술 역사상 드물다. 이 자체로 새로운 전시라고 생각한다”라며 우월감도 든다고 했다.
 
김 화백이 최신작을 포함한 20여 점을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내걸었다. 전시 개막일이자 기자간담회가 열린 지난 10일은 김 화백의 백 세 번째 생일이었다. 이번 전시 출품작은 3년 전 열린 개인전 이후 작업한 것들로, 상수(上壽)를 넘긴 그의 최근 관심사와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리다. 백 세를 훌쩍 넘긴 노화백이 여전한 현역으로서 매일 작업을 이어가며 결과물을 내보이는 것 자체가 예술일지어니. 노장의 형형한 눈빛만큼이나 강렬한 화면은 에너지를 뿜어내며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산의 동쪽-서사시> 162.2x130.3cm Oil on Canvas 2019
 
김병기에게 추상미술은 정신성과 형상성의 공존이다. 이 맥락에서 근본적으로 회화는 형상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결국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형상만을 그대로 재현한 회화는 모방한 장식품에 불과하다. 김병기는 추상화에 몰두해오면서도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그려왔다. 단순 기하 추상인 것 같으면서도 실루엣이 보이고 소재가 존재하는 이유다. “추상화가처럼 작품 활동을 했지만 사실 나는 체질적으로 형상성을 떠날 수 없었다. 형상과 비형상은 동전의 앞뒷면에 불과했다.”
 
김병기의 추상화는 형상과 대립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정신성과의 조화를 통해 현실 세계를 담아내는 방식 중 하나다. 즉, 그의 작업은 추상과 구상, 그 틈새에 있으며 서로 다른 두 가지의 특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추상을 넘어, 오브제를 넘어, 원초적인 상태에서 수공업으로 작업하는 게 중요하다. 그림 그린다는 건 원초적인 동시에 영원성을 지닌다”고 거듭 강조했다. 
 
출품작 <산의 동쪽-서사시>(2019)는 흰 담벼락과 소나무, 감나무 그리고 여기에 황혼이 지며 드리운 그림자를 그린 것이다. “새빨간 삼각은 그림자다. 하나만 있으면 외로워 보여 삼각형을 더 그렸다. 노란색은 황혼이고 검은 선들은 나무다.” 본래 그는 다크 브라운 계통의 시커먼 작품을 많이 했지만 근래 들어선 색채에 대한 욕망이 인단다. “앞으로는 컬러풀한 작품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라는 말이 머쓱한지 크게 웃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 3년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두터운 마티에르를 형성한 여성 누드 <역삼각형의 나부>도 공개했다. 한국 여성상을 역삼각형으로 표현했다. “정삼각형은 안정적이라면 역삼각은 불안하지만 깊이가 있다. 나는 역삼각을 즐겨 쓴다.”
 
<성자(聖者)를 위하여> 130.3x97cm Oil on Canvas 2018
 

<역삼각형의 나부> 145.5x112.1cm Oil, Gesso and Charcoal on Canvas 2018
 

전시 타이틀 ‘지금, 여기’는 그가 미국에서 접한 장 푸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çois Lyotard)의 ‘포스트모던의 조건’(1979)에서 따온 것으로, ‘지금’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현재의 시간, 의식적으로는 알 수 없는 시간을 말한다. 화가는 캔버스의 빈 화면을 보면 이와 같은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은 시간인 ‘지금’을 경험하게 되며 동시에 이 공간을 채워 넣고자 무아경에 빠진다.
 
화가는 리오타르의 말대로 ‘무엇이든 다 되는 세계’ 즉,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는 것. 김병기는 이러한 개념을 동양 사상의 ‘무위(無爲)’와 동일하게 여긴다. 빈 캔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담은 ‘무위’이자 ‘지금’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그의 그림에서 분할과 여백으로 표현된다. 김병기만의 독특한 선묘(線描)다.
 
전통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붓의 흔적과 직선, 마스킹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 내는 방식으로 구현한 빈 여백이 선적이면서도 회화적이고, 조형적이면서도 비조형적인인 화면을 완성한다. 이처럼 김병기에게 여백과 선에 의한 분할된 공간은 무위의 개념이자 ‘지금’이다.
 
가나아트센터 맞은편 위치한 화실에서 매일 작업한다. 어떤 날은 밤새워 그릴 때도 있다고 했다. 화실에서 붓을 든 김병기 화백. /가나아트
 
오랜 시간 화업을 이어오며 스스로 정립한 예술론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예술에 있어서 ‘1+1=2’만 옳은 건 아니다. 0도 되고 5도 되고 모든 게 가능한 세계가 예술 세계 아니겠나. 나 역시 그런 예술을 하고 싶다. 복합성의 예술, 그것은 창의적 복합이다. 2는 절충이다. 예술에 있어 제일 나쁜 게 절충이다.”
 
단색화에 대한 쓴소리도 늘어놓았다.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같이 작품이 다 똑같아 보인다. 갑이 한 건지, 을이 한 건지 구분하기 힘들다. 한국은 색채적으로 단순한 나라가 아니다. 한복만 봐도 얼마나 화려한가. 오방색도 마찬가지다. 무색은 우리 전통에 어긋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컬러풀한 나라다.”
 
김 화백은 그림에 여지(餘地)를 남긴다. 완성된 것처럼 보여도 미완작이다. 열린 결말처럼 생각할 여지를 둔다. “인생처럼 작품에도 완성이 없거든.” 그렇다면 그 미완이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신호는 코에서부터 온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면 ‘됐다’는 신호다. 이성을 넘어선 감정의 단계지.” 5월 1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