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쌓여 형성된 지층처럼… ‘퇴적된 유령들’展

  • 아트조선

입력 : 2019.04.04 10:22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 기획전 <퇴적된 유령들>, 6월 9일까지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긴 시간과 노동집약적인 행위로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는 국내 작가들을 조명한 현대미술전시 <퇴적된 유령들(The Accumulated Ghosts)>이 6월 9일까지 청주시립미술관 분관 대청호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김원진, 김윤경숙, 김윤수, 이규식, 이수진, 조소희, 편대식 등 7명의 작가는 가볍거나 얇은 물질을 소재로 해 반복적인 행위와 노동집약적인 작업방식으로 시간성을 보여준다. 
이규식作 <李규식>(2019), 편대식作 < Moments >(2017), 김원진作 <깊이의 바다>(2017~2018) /대청호미술관
미술관 1층 로비는 이규식의 작품으로 꾸며진다. ‘문자 쓰기’로 빼곡하게 채운 <李규식>은 전시 기간 중 5주 동안 미술관 로비에서 직접 문자드로잉을 한 작품으로, 로비 현관문, 유리벽, 기둥, 가벽 등 로비 1층의 시설물과 그 사이 틈새까지 노란 형광색 분필로 빼곡하게 채워 일상의 사소한 것에도 집착하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표현한다.
지층 단면처럼 층층이 쌓인 재료의 물성이 드러나는 편대식, 김원진 작가의 회화와 설치작품도 눈여겨봄직 하다. 편대식은 15m 대형 롤지 위에 연필로 빈틈없이 빼곡하게 칠한 <순간>은 미술관 1전시실의 콘크리트 벽면을 감싸는 형태로 설치됐다. 어떤 대상의 재현과 이미지도 없으나,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연필의 흔적들과 수만 가지 선이 쌓인 거친 표면 속에 노동의 흔적이 녹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김원진은 시간이 흐름과 상황에 따라 변이하는 기억의 속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겹겹이 쌓는 드로잉이나 조각적 형태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자신의 일상 기록물과 수집한 책을 태운 재를 석고와 밀랍을 섞어 겹겹이 쌓아올리거나 얇은 판형을 만든다. 1전시장 바닥에 깔린 <깊이의 바다>는 전시기간 동안 가루와 파편으로 바스러지도록 설치하고, 그 중심에 사각의 형태로 얇고 길게 쌓아 올린 <너를 위한 광장>은 긴장된 상태로 세워 기억의 연약하고 불명확한 속성들을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조소희作 < Daecheong ho Museum of Art Where... >(2019), 김윤수作 <바람이 밤새도록 꽃밭을 지나간다>(2016) /대청호미술관
눈에 보이지 않은 시간의 흐름과 자연 현상을 여성작가의 섬세한 감성으로 표현한 조소희, 김윤수의 드로잉, 설치로 2전시실이 구성된다. 조소희의 <Daecheongho Museum of Art Where…>은 가늘고 연약한 실들이 노동집약적인 작업 과정으로 서로 맞물려 넓은 공간을 채우며 새로운 존재감을 드러낸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흐름과 노동의 과정으로 엮인 실선들은 보이는 각도에 따라 매 순간 다르게 겹쳐 보이면서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로 다가오며 우리를 깊은 사색의 길로 인도한다.
김윤수는 오랜 시간과 자기수행의 방식으로 현실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시공간의 경계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지속해왔다. 최근에는 깊은 사유와 성찰을 바탕으로, 자연의 현상 속에서 인간의 유한한 삶과 만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을 서정적인 심상으로 포착한다. <바람이 밤새도록 꽃밭을 지나간다>는 바람 드로잉을 360장 인쇄하여 쌓아 올리거나 아코디언 형태의 종이 위에 그린 것으로, 꽃이 핀 평원을 섬세하게 드로잉한 작품을 감상 할 수 있다.
김윤경숙作 <그날>(2009), 이수진作 < Glass+Landscape+Super+Babylon >(2019) /대청호미술관
3전시실에는 시대의 환경과 상황이 담긴 지층과 같이 현재의 삶과 사회의 모습을 작품에 담은 김윤경숙, 이수진의 작품이 걸린다. 김윤경숙은 개인의 비극이 단지 개별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의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하며, 선긋기 혹은 바느질, 비닐테이프 붙이기와 같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은폐, 망각되어가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샹들리에 유리장식에 붉은 선을 촘촘히 채워 넣은 <그날>과 붉은색 테이프로 벽면을 감싸고 다시 뜯어 원상태로 돌리는 과정을 기록한 <망상의 침몰> 속의 반복적인 행위는 개개인 삶의 상처에 대한 위로이자 또한 시대의 아픔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시대를 향한 외침이자 의식이다.
이수진은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공간이 함축하고 있는 시간성과 서사성에 관심을 두고 폐유리, 나일론 실 등과 같은 물질들은 산업화 사회에서 부스러져 나오는 잔여물을 소재 삼아 다양한 설치 작품을 보여준다. 출품작 <Glass Landscape>는 청계천 유리, 수공상점 주변에서 자투리 유리들을 수집 한 뒤, 마치 잔디밭이나 이끼처럼 설치했는데, 이는 청계천은 급속한 산업화로 변화의 진통을 앓은 서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빠른 속도로 급속한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대사회 모습과는 반대로, 이번 전시는 가늠하기도 힘든 긴 시간과 치열한 노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마치 오랜 세월동안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지층과 같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