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3.22 18:38
니콜라스 슬로보, 한국서 첫 개인전… 5월 18일까지
"내 작업은 소수민족·동성애자로서 정체성 탐색해가는 과정"
리본, 가죽 소재 최신작 선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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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렁치렁한 리본과 끈이 캔버스 밖으로 늘어진다. 화면 밖으로 뛰쳐나온 듯한 형상이 괴이하다. 남아프리카 작가 니콜라스 슬로보(Nicholas Hlobo·44)가 독특한 작품을 들고 한국 관람객과 처음으로 마주했다. 리본, 가죽, 나무, 고무 등 특징적인 재료를 사용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회화와 조각을 20일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펼쳐보였다.
이날 자리에는 데이비드 머핀(David Maupin) 리만머핀 공동 대표가 깜짝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그가 서울 브랜치의 전시 행사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슬로보에 대한 열렬한 관심과 지원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머핀 공동 대표는 “이번 출품작은 모두 서울에서의 전시를 위해 준비한 최신작들로 시적인 감수성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리만머핀은 지난해 7월 뉴욕에서 슬로보의 개인전을 개최하고 이어서 12월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에서 캐비닛 섹터를 통해 슬로보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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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보는 젠더, 성적 정체성, 민족성과 관련된 고정관념 외에 존재하는 특성을 규명해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캔버스에 담는다. 정체성을 둘러싸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제한적인 용어들에 저항하기 위해 그의 민족적, 문화적 배경과 관련된 시각적 비유를 쓰길 즐긴다. 그중 언어와 스토리는 슬로보의 작업에서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작가는 남아공 원주민 공동체 중 하나인 코사(Xhosa)족 후손으로서, 작품명을 의식적으로 코사어로 짓고 있다. 이는 작가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남아프리카’라는 포괄적인 용어에 대한 도전이자, 그의 문화적 정체성에 힘을 부여하고자 하는 작가 스스로의 자존을 뜻하기도 한다. 모국어, 즉 문화유산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인 셈.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미술계 역시 영어가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에 대한 내 의견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죠. 그렇다고 내 작품이 코사어에 의존한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작품에 결을 입히는 제 방식 중 하나일 뿐이에요.” 뜻을 알 수 없는 코사어로 표기된 타이틀을 통해 작품의 다층적인 의미를 찾는 문화적 해석의 행위에 관객을 직접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반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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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재료를 보다 큰 미학적인 형태로 변형하는 것은 정체성의 유동적인 본질과 구성에 대한 은유이자 이 자체를 재창조하는 행위를 상징한다. 작가는 출생, 삶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순환을 시각적인 하나의 오브제로 해석한는 것에 관해 일관되게 탐구해왔다. 이를테면 리본 스티치의 우아한 곡선과 아라베스크 문양은 브론즈, 구리, 금관악기를 주조해 만든 조각에서도 이러한 작가의 작업세계를 읽을 수 있다. 회화와 조각 작업에서 특정한 재료를 변형하는 행위는 그의 작업에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다.
칼을 사용해 캔버스를 구멍 내거나 찢은 뒤, 이를 따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리본으로 꿰맨다. 물감이나 붓을 사용하지 않는 슬로보는 촘촘한 바늘땀 자국으로 붓이 지나간 궤적을 대신한다. 이러한 행위는 작가에게 명상과도 같다. 정적이고도 오롯이 신체의 움직임과 캔버스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치유를 얻는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작업은 나의 테라피스트(Therapist)에요. 치료받는 데에 따로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장점이네요(웃음).” 찢고 꿰매 이어붙이고 때론 필요 없는 부분은 내다버리면서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재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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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슬로보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머물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작품은 파리 루이비통재단, 남아프리카 국립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등에 소장돼 있다. 롤렉스 비주얼아트 프로티지(2010~2011), 스탠다드은행 젊은작가상(2009), 톨맨어워드 시각미술부문(2006) 등 다양한 기관에서의 수상 이력도 눈에 띈다. 작가의 국내 첫 개인전은 5월 18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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