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3.08 14:16
비닐봉지로 만든 기괴한 거대 형상
“神적 존재 연상하지만 실상은 무용지물일 뿐”
개인전 ‘흰 코끼리’서 신작 다수 선봬… 31일까지 P21

이병찬(32)의 ‘비닐괴물’은 현대사회 생산과 소비 시스템 속에서 태어난 기이한 물체다. 도시화된 환경에서 무한히 만들어지고 폐기되길 반복하는 비닐봉지를 매체로 삼아 작가의 판타지를 더해 변종 피조물을 만든다. 작가는 대규모 도시개발이 진행 중이었던 송도국제도시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는데,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가 대도시 개발 현장에서 느낀 괴리감과 소외감은 소비 생태계에 주목하게 된 계기였다. 현란한 아파트 분양·투자 현수막과 광고지로 가득한 도시개발 지역에서 작가는 자신이 바라본 도시의 기이한 현상과 풍경을 비닐을 소재로 거대한 유기체로 빚었다.
비닐은 경제적 여건이나 사회적 위치와는 크게 상관없이 편의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더라도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사물이다. 그러나 쉽게 얻은 만큼 버려지기도 쉽다. 작가는 용도를 잃어 상품으로서 가치를 잃고 하찮아진 비닐을 일회용 라이터로 용접해 여러 장 이어 붙여 공기를 채운다. 이어 LED 조명을 혼합해 생명력을 부여한다. 소비 사회의 근원이자 이를 다스리는 위력을 지닌 신과 같은 형상의 기괴한 거대 유기체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얄팍한 비닐 껍질과 자극적인 원색으로 빛나는 그의 괴물은 그저 알맹이 없이 껍데기일 뿐이다.

이병찬의 개인전이 2년 만에 마련됐다. 이번 전시를 통해 소비문화의 화려함에 맹목적으로 중독돼 신성화됨과 동시에 애물단지가 된 존재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양태를 지적한다. 새롭게 선보이는 3D 프린팅 조각은 작가가 지금까지 이어온 소비 생태계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려는 시도로, 기계화된 생산 과정과 유사한 출력과 도색의 단계를 거쳐 제작된다. 비닐괴물의 형태를 본 따 설계됐지만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은 부품을 상징한다.
전시명 ‘흰 코끼리’는 경제용어에서 차용된 것으로, 흔히 불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대상으로 알려지지만 경제용어로는 ‘유지를 위해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나 실상은 무용한 존재’를 뜻한다. 오늘날의 소비 생태계가 이처럼 어긋나는 두 가지의 중의적 상황에 처해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작가는 휘황찬란하지만 폐기를 전제하는 조악하고 거대한 설치작품과 공산품의 생산 과정을 역으로 모방해 만들어진 조각품을 두고 스스로 ‘흰 코끼리’라고 말한다. 생산이라는 행위마저 소비하게 된 기형적 현태를 비판하고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자성적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전면이 유리로 된 전시장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화려함으로 점철된 쇼윈도를 연상한다.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하릴없이 부풀어졌다 사그라들기를 거듭하는 이병찬의 비닐봉지는 오색의 비단 헝겊 조각이 서낭나무에 매어져 나풀거리는 모습과 결합되며 도시를 소비라는 신을 맹목적으로 모시는 신당으로 묘사하는 듯하다. 전시는 이달 31일까지 P21에서 열린다.
한편, 이병찬은 인천가톨릭대학교 도시환경조각과, 동대학원 환경조각과를 졸업했다. 송은아트큐브(2017), 코너아트스페이스(2015)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난지창작스튜디오(2018), Frappaz Centre National des Arts de la rue(2014, 프랑스)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Copyrights ⓒ 조선일보 & 조선교육문화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