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ist] 빈센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 백지홍 월간미술세계 편집장

입력 : 2019.02.19 10:39 | 수정 : 2019.02.19 10:45

<러빙빈센트 展>포스터
오늘날 몇몇 예술가의 이름은 실질적인 품질 보증을 넘어 이른바‘감성’까지 담아내는 브랜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를 미술계가 낳은 최고의 대중 브랜드로 꼽는다면 반대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고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미술사를 교육하는 곳이라면, 아니 TV와 영화 등 대중문화가 들어온 곳이라면 그곳에는 반드시 고흐가 있다. 일단 스타가 되면 자신의 이름을 다시 알릴 수많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가. 슈퍼스타 고흐 역시 수많은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이미 유명한’ 자신의 이름을 다시 알려 왔다. 지금 필자가 쓰고 있는 이러한 글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술과 상관없어 보이는 SF 드라마까지 말이다. 고흐처럼 특별한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이 스토리 속에 녹여낼 수 있는 화가가 몇이나 있겠는가. 그 덕분에 미술에 처음 관심을 둔 이에게 고흐는 자신의 가까이에 존재하는 너무나 친절하고 매력적인 작가일 것이나, 미술을 업으로 하는 이에게 고흐는 대형 마트에서 반복되는 CM송처럼, 끊임없이 반복될 뿐 새로운 자극을 주지 못하는 무언가가 된지 오래다. 고흐는 계속해서 찾아온다. 여기 고흐를 다룬 또 다른 영화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딘지 다르다. 마치 고흐가 그린 유화 작품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 최초의 유화 장편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가 그 주인공이다.
대중이 사랑한 작가, 대중이 사랑한 영화                                                       
<러빙빈센트>스틸이미지
일반적으로 실험적 요소가 강한 영화들은 흔히 말하는 ‘오락성’ 보다는 실험 자체의 성취를 중심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 평점은 높은데, 대중 평점은 낮은 그런 영화들 말이다. 그런데 〈러빙 빈센트〉는 전문가 평점도 높은데, 일반 관람객의 평가는 더욱 높다. 즉, 꽤 재밌는 영화라는 게 관람객의 중론이란 뜻이다. 실제로 2017년 11월 9일 개봉한 〈러빙 빈센트〉는 38만 관객이 찾으며 소규모 개봉 영화로는 크게 흥행했고, 《러빙 빈센트展》의 개최와 유사한 시기에 제작 과정을 추가하여 재개봉한 〈러빙 빈센트: 비하인드 에디션〉 역시 관람객들의 지지를 받으며 현재까지 상영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흥행의 원인은 〈러빙 빈센트〉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고흐의 특징을 정확히 캐치한 영리한 영화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고흐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예술가가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이른바 ‘낭만적인 예술가’ 혹은 ‘비극적인 예술가’의 전형으로서 그의 비극적인 삶이 주는 매력에 있다. 첫 일자리였던 화랑에서는 쫓겨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직자가 되려는 노력도 실패한 28세에 처음 붓을 잡아 10년 만에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창작 외에는 지극히 불안한 광인(狂人)처럼 살다 자살한 작가. 생전 단 1점 밖에 그림을 팔지 못하고 동생 테오도르 반 고흐(Theodor van Gogh, 이하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한 것에 고통스러워했지만, 사후 가장 비싼 가격에 작품이 판매되는 작가가 되었다는 것도 ‘예술가는 죽어야 인정받는다’라는 통설에 부합한다.
<러빙빈센트>스틸이미지
〈러빙 빈센트〉는 그러한 고흐의 삶, 그중에서도 “왜 자살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영화의 중심에 놓았다. 그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주인공은 ‘아르망 룰랭(Armand Roulin)’이다. 우체부 조셉 룰랭의 아들인 아르망 룰랭은 아버지와 고흐의 친분 덕에 〈아르망 룰랭의 초상〉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흐와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기에 관객과 함께 고흐가 숨을 거둔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 시기의 삶을 추적하는 인물로서 적절했다. 영화에 따르면 그가 고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관객이 알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림에 몰두한 작가이자, 자기 귀를 자른 광인이며, 가난에 시달렸다는 것. 아버지의 부탁으로 빈센트 반 고흐가 테오에게 남긴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시작한 그의 여정은 어느새 정신병원을 퇴원하고 오베르에 정착했던 고흐가 왜 자살을 택하였는지 추적하는 추리 과정으로 변한다. 아르망 룰랭은 흡사 느와르 영화의 탐정처럼 고흐에 대한 서로 다른 증언들을 짜 맞춰 진실을 찾아간다. 고흐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가셰 박사나 탕기 영감, 조셉 룰랭과 같은 이를 주인공으로 했다면 이러한 추리물로서의 재미는 줄 수 없었을 것이다.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를 중심으로 권총 자살 당시 사망 진단서, 고흐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의 기억 등 수많은 기록들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고흐가 자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하지만, 음모론으로 끌고 가기 보다는 그러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고흐의 삶을 입체적으로 들려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모든 에피소드가 끝나고 아르망 룰랭은 아버지에게 고흐는 자신이 생각한 단순한 광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영화를 만든 이들은 관객들이 고흐가 단순한 광인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그가 겪은 고통을 공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러빙빈센트>스틸이미지
그런데 비극적 삶만으로는 고흐가 많은 이가 사랑하는 ‘화가’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특별한 화가로 만든 것은 특별한 그림이다. 자신의 감정을 쉽게 이기지 못했던 고흐지만,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 그리고 두터운 질감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는 능수능란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고흐의 목소리는 워낙 강렬해서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라면 그림을 보고 고흐(특히 후기)의 그림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이가 ‘알아차릴 수 있기에’ 고흐의 화풍을 따라 그린 유화들은 특별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영화였으면 꿈틀거리는 화면의 과도한 정보량이 영화에 집중하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나, 그것이 고흐의 이야기를 고흐 화풍의 유화로 표현한 영화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기에 참고할만한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 회상 부분은 당대 흑백사진들을 바탕으로 질감이 덜 강조된 그림들로 채웠는데, 회상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색채와 질감 표현에 지친 눈이 쉬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영리한 선택이었다.
이야기와 그림 외에도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은 존재한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시얼샤 로넌(Saoirse Ronan)을 비롯한 베테랑 배우들과, 연극계에서 활동하던 신인 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는 유화라는 매체를 넘어 관람객에게 전해진다. 귀 또한 즐겁다. 영화의 음악감독은 광기에 빠져드는 예술가를 다룬 〈블랙스완〉을 비롯하여 〈레퀴엠〉, 〈더 문〉, 〈스토커〉 등의 영화에서 감미로우면서도 불안한 심리를 탁월하게 표현해온 클림트 만셀(Climt Mansell)이다. 그는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여 고흐의 삶을 추적하는 이야기에 특유의 분위기를 더했다.
빈센트를 사랑하는 이들의 손에서
<러빙빈센트> 재개봉 포스터
고흐를 둘러싼 그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 〈러빙 빈센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결국, 그의 인생을 말하기 위해 고흐의 작품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러빙 빈센트〉가 고흐의 그림을 영화 속에 녹여내는 방식은 1,000만 관객을 목전에 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일생을 다루기 위해 퀸(Queen)의 노래를 사용한 것을 훌쩍 뛰어넘는다. 95분에 달하는 상영 시간 전체를 한 작가의 그림으로 채워 넣는 것 이상의 헌사가 존재할까.
물론 진짜 고흐의 그림들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고흐의 대표작 94점을 기준 삼아 그의 화풍을 본 따 새롭게 그린 그림들이 영화를 구성했다. 매 1초마다 12개의 그림으로 이뤄진 〈러빙 빈센트〉를 위해 65,000 프레임의 유화가 그려졌다. 단순히 따라 그린 것은 아니다. 반 고흐가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것과 달리 영화 〈러빙 빈센트〉는 고정된 비율을 유지해야 했다. 고흐가 즐겨 그렸던 캔버스와 가장 유사한 화면비율(1.33:1)을 택했지만, 많은 그림들은 변형된 프레임에 맞춰 새롭게 구성되어야 했다. 또한, 영화의 스토리에 맞게 고흐가 그린 낮풍경이 밤 풍경으로 변화하기도 하고, 여러 그림이 한 장면 안에서 합쳐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러빙 빈센트〉는 등장인물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배우들의 연기를 촬영한 영상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는데, 배우들도 고흐 스타일로 그려야 했다. 물론, 고흐는 그림에 따라 조금씩 다른 표현 방식을 사용했으니, 어떤 그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에 따라 배우들을 그리는 화풍도 조금씩 변화했다. ‘고흐가 이 배우를 그렸다면 이렇게 그렸을 것이다’라는 설득력을 갖추지 못하면 〈러빙 빈센트〉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영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익히고, 고흐의 화풍을 익혀야 했으며, 함께 영화를 만드는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톤을 맞춰야 하는 도전을 마주해야 했다.
‘세계 최초의 유화 장편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가 만들어지기까지 공동 감독이자 부부 사이인 도로타 코비엘라(Dorotas Kobiela)와 휴 웰치먼(Hugh Welchman)은 10년 동안 프로젝트에 매달려야 했다. 2007년 도로타 코비엘라 본인이 그린 유화 작업들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려는 계획을 시작했고, 2010년 영화의 장편화를 주장한 휴 웰치먼이 제작에 참여하면서 20개국에서 125명의 화가가 참여한 초대형 프로젝트로 변화했다. 노동집약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의 특성상 유화로 장편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고흐의 그림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어하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을 통해 제작비를 지원하였으며, 자신의 그림이 영화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는 수많은 화가들이 인근 유럽은 물론 미국, 일본에서 포트폴리오를 보내왔다. 불가능할 거라 여겨졌던 프로젝트는 빈센트를 사랑하는 이들에 의해 2017년 완성되어 관객을 찾아온 것이다.
〈러빙 빈센트〉를 만날 수 있는 기회
<러빙빈센트 展>전시전경
〈러빙 빈센트〉를 관람한 이라면, 십중팔구는 영화를 제작하는데 사용된 유화 작업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감독들도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영화의 공개와 함께 《러빙 빈센트展》은 세계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자가 직접 기획에 참여한 만큼 단순히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졸속으로 진행된 전시가 아니라 하나의 완결성을 가진 전시가 되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고흐, 〈꽃이 있는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1886 추정
먼저 영화에 사용된 유화 작업 중 엄선하여 가져온 125점의 회화는 고흐가 아닌 이들이 그린 고흐 풍 그림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자아낸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화를 염두에 둔 만큼 상대적으로 터치가 크고 거칠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흔히 ‘고흐 같다’고 말하는 시각적 특성이 무엇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이번 전시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의 원작 〈수확하는 두 농부〉, 〈강이 있는 풍경〉, 〈꽃이 있는 정물화〉를 만날 수 있어 고흐의 원작과 〈러빙 빈센트〉 제작에 사용된 그림을 비교하면서 관람할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영화를 보고 전시를 찾은 이들의 기본적인 기대는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유화 작업들 외에도 영화 제작 단계에서 조사하고 정리한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여러 이야깃거리들과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한 이모저모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한다. 작품에 등장한 실존인물이 역사에 어떤 기록을 남겼고 그 인물을 연기한 배우는 어떤 배우들인지 앞뒤로 확인할 수 있는 패널을 만들어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가 하면, 영화의 핵심 질문이었던 고흐의 죽음과 관련한 정보들을 마치 사건의 실마리를 흩트려놓은 탐정의 방처럼 연출하여 선보이기도 한다. 또한 영화에 사용된 그림과 원본 그림의 차이를 비교해 놓은 출력물이나, 영화의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과 메모 등도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전시 후반부의 ‘라이브 페인팅’ 코너에서는 영화제작에 참여한 화가 중 한 명이 전시 기간 중 영화 제작시 사용한 기법으로 유화 애니메이션 작업을 실시간으로 진행하고 있어 관심을 자아낸다. 오히려 흥미를 느낀 관람객들이 선을 지키지 않아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러빙 빈센트〉 블루레이
빈센트를 사랑하는 이들이 만든 이 영화와 전시의 목적은 명확하다. 기존의 팬들을 만족시키는 것, 그리고 새로은 팬 층을 유입하는 것이다. 영화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했고, 《러빙 빈센트展》 역시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궁금해 한 관객들이라면 꽤 흡족할 만한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영화를 안 본 관람객이라면 영화를 본 관람객만큼 전시를 즐길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영화 〈러빙 빈센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제작과정이 궁금했던 필자는 〈러빙 빈센트〉 블루레이도 구입했으니 이 영화와 관련된 콘텐츠는 이제 거의 섭렵한 것 같다. 그럼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블루레이에 담긴 런던영화제 프리미어 행사 영상은 그 힌트를 던져줬다. 차기작에 대한 질문에 휴 웰치먼은 다음에는 ‘프란시스 코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그림을 바탕으로 공포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으니 말이다. 궁중의 화려함과 자신을 둘러싼 일상, 그리고 역사적 비극과 환상을 오간 고야의 그림이면 충분히 공포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검은 그림’ 연작은 고흐의 유화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알아볼 만한 독특한 그림이지 않은가. 어쩌면 5년쯤이 지난이 자리에서 세계 두 번째 유화 장편 애니메이션 〈고야〉와 영화에 사용된 작품들을 전시한 《고야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전까지는 반 고흐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에게만 주어진 이 특별한 영화와 전시를 즐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