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1.08 23:43
알베르토 부리, 반세기 걸친 전 연작 내건 회고전,
12일까지 파리 Tornabuoni Art서 개최…
군의관 출신, 포로수용소에서 그림 그리다 작가로 전향
포대 자루, 플라스틱 등 쓰레기 소재로 독특한 콜라주 작업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 1915~1995)는 합판, 마포, 포대 자루, 플라스틱 등의 폐품을 녹이거나 불태우고 찢고 이를 캔버스에 꿰매는 등 다채로운 시도의 콜라주와 아상블라주 작품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출신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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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르네상스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을 좋아하며 드로잉을 즐기던 부리는 일찍이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으나, 미술과는 거리가 먼 의학도의 길을 걸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군대로 차출돼 군의관 생활을 하던 중, 포로로 붙잡혀 미국으로 끌려가 수감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포로로 수용된 이때의 경험은 잊고 있던 그의 예술적 갈증을 되살리는 결정적 터닝 포인트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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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광경과 트라우마는 부리에게 의사로써의 삶에 회의를 가져왔다. 수용소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작가는 2년 후 로마로 돌아가 전업 작가로 전향, 본격적으로 미술 작업에 몰두한다. 의술로 사람을 치료하고 수술하던 부리는 그 대신 마포를 기우고 캔버스를 꿰매는 삶을 선택한다.
부리의 작품은 단순히 장식적인 그림이 아닌, 전쟁을 막 통과한 당시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 불로 지져 녹아내린 플라스틱과 나무, 애써 실로 기운 마포 아래 빨갛게 비치는 물감은 모두 전쟁의 처참한 광경과 같다. 작가의 작품이 참혹하고도 파괴적인 경험을 공유한 유럽 전역에 즉각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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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의 반세기에 이르는 작업 세계와 작품 일대기를 되짚는 회고전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다. 1972년 국립근대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이후, 40여 년 만에 프랑스에서 마련된 자리다. 이번 전시는 크게 여덟 가지 시리즈로 구분되는 부리의 연작을 소재와 화풍으로 나눠 ‘Catrami(타르)’ ‘Muffe(몰드)’ ‘Sacchi(배낭)’ ‘Legni(나무)’ ‘Ferri(철)’ ‘Plastiche(플라스틱)’ ‘Cretti(균열)’ ‘Cellotex(단열재)’ 등으로 구성, 그가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력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는 낡은 마포나 숯덩이, 찌그러지고 녹슨 금속 등 쓰레기와 파치를 재료 삼아 추상기법을 더해 독특한 콜라주를 제작했다. 부리의 작품은 쓰레기를 활용하는 정크 아트나 가난한 예술, 즉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렇듯 재료 선택에 거리낌이 없었던 부리의 작품을 돌아보면, 현존하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테크닉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부리가 이미 다 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마포는 그의 작업에서 상징적인 재료 중 하나다. 부리는 마포의 거칠고 도드라진 물성을 활용해 작품 여기저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마포를 철사로 엮어 잇대거나 마포를 찢어 그 사이로 색면이 보이게 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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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드’ 시리즈는 1950년대 초반 시작됐다. 몰드를 실제 재료로 사용한 것은 아니고, 몰드의 모양에서 따온 연작명이다. 부리는 이 시기, 합성 레진, 경석 같은 광물 조각을 물감과 섞어 썼다. 비슷한 재료를 썼던 동시대 초현실주의나 큐비즘과는 달리 부리의 ‘몰드’ 시리즈는 완전히 추상적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이때 그의 작품을 보면 거친 화면 위에 어떠한 내러티브도 없이 경석 조각이 그저 무겁게 내려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재료에 의한 우연성이 적절히 작동하며 회화적 요소를 충족시켰으나, 부리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재료 발굴을 멈추지 않았다.
공업용 플라스틱 필름과 방수포 등을 소재로 하는 ‘플라스틱’ 시리즈는 작가가 직접 토치로 재료를 녹여 제작된다. 불에 연소되는 플라스틱의 물성과 녹는 그 속도를 활용해 ‘조각’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1950년 중반부터 몰두한 ‘나무’ 연작도 인상적이다. 여러 실험적인 시도에 거침없었던 부리는 오크나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얇은 널빤지 한가운데를 불로 지져 구멍을 뻥 뚫거나 검게 그을려 질감과 입체감을 살렸다. 이때부터 불을 아예 하나의 작업 도구로 삼고, 목재 외에도 플라스틱, 마포 등 자신의 여러 시리즈에 도입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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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작업한 초기 작품부터 1990년대 작고 직전 제작한 후반기 작품까지 부리의 전 연작 30여 점이 출품된 이번 전시는 12일까지 파리 Tornabuoni Art에서 열린다. 입장료는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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