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남사 이준 “일평생 새로움 추구한 신인이라 불러주오”

  • 아트조선 윤다함 기자

입력 : 2018.11.28 18:18

자연 향한 애정 어린 심상 담은 기하 추상의 大家
국내 미술史에 구상-비구상 변환 선구자적 역할
 

올해 상수를 맞은 이준 화백. 자택 한편에 차린 작업공간에서 포즈를 취했다. /임영근 기자
 
남사(藍史) 이준 화백은 날카로우리만큼 정교한 기하추상의 선구자로, 지난 50년간 자연을 순수 조형으로 재해석한 색면 추상을 선보여 왔다. 김환기, 유영국, 한묵 등 한국 추상화가들과 교류하며 국내 미술사에서는 구상과 비구상으로의 변환에 있어 가교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의 작품은 분할된 화면과 기하학적 패턴으로 이뤄지지만 마냥 엄격하거나 차갑지만은 않다. 세밀하고 작은 형태소로 표현돼 리드미컬하고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자연의 대상과 분리된 것이 아닌, 산과 나무, 해, 달 등 그의 마음속 내재된 자연의 이미지가 여과돼 나타났기 때문. 캔버스에는 그가 살아온 삶과 그 궤적, 자연을 향한 애정 어린 심상이 담겨있다.
 
이준 화백이 올해 꼭 상수(上壽)를 맞았다. 상수전(上壽展)을 가진 국내 화가는 윤중식(2012), 김병기(2016) 이후 이 화백이 세 번째다. 올해 상반기 경남도립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어느 때보다 활발한 전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현역이다.
 
경기도 일산의 자택에서 만난 노화백은 삼순(三旬)이 기자의 장황하고도 우매한 질문에 간명하고 명쾌하게 답했다. 볕살이 낫낫이 드는 창가에 기댄 이젤에 가족 초상화가, 그 아래로는 팔레트와 물감, 붓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준 화백의 가족 초상화. /임영근 기자
 
─ 가족을 그리신 건가 보다. 맨 왼쪽은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과 아드님? 

“맞다. 조금씩 손대니 작품 하나 완성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몇 년 전, 작업실을 정리하고 캔버스와 재료를 가져와 집에 작게나마 차려놨다. 거동이 마음처럼 쉽지 않으니 지척에 소박하게 벌여놓았지. 본디 매일 여덟 시간은 작업실에서 보냈지만 이제는 옛날 얘기다. 그래도 하루를 빼먹지 않고 습관처럼 재밌는 취미마냥 이젤 앞에 자동으로 앉게 된다.”
 
─ 본래 기하추상에 몰두하지 않으셨던가. 기하추상 이전,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그렸던 구상이나 삐에로로 회귀한 것인지?
 
“구상이 기하추상화에 비해 기술적으로 좀 더 쉽다. 나이가 있는데 이제는 정교한 붓질이 어렵고 예전처럼 세심한 걸 하기 힘들더라. 그래서 이전에 했던 구상을 다시 그려보는 거다. 오랜 시간 그려온 삐에로 그림은 내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마지막 작품은 삐에로이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1960년대 자화상으로 삼은 삐에로 그림을 최근 다시 즐겨 그린다. 올해 작업한 최신작이 자택에 걸려있다. /임영근 기자
 
─ 언급했다시피 기하추상 이전에는 정통 구상을 추구하셨다. 그러면서 삐에로와 자화상을 선보이지 않았나. 삐에로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건지? 

“1973년 파리에 갔을 때 프랑스 연출가이자 배우인 장루이 바로가 광대를 연기하는 걸 봤다. 그때 그가 분한 삐에로에 인생의 모든 순간과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한 인상을 받아 삐에로를 주제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조르주 루오도 광대를 그리지 않았던가. 이후 삐에로를 내 자화상으로 삼게 됐다. 사람을 웃기고 즐겁게 하려고 야단스럽게 치장한 그 모습에는 어딘지 허약하고 슬퍼 보이는 구석이 보인다. 어둡고 무겁게 깔린 회색 바탕에 너무나 슬퍼 피눈물이 모여 빨개진 코, 짙은 화장 밑에는 말라버린 눈물이 있고 지쳐 퇴색된 피부가 있다. 삐에로의 그 오묘한 표정과 짙은 화장에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이겨내려는 우리의 모습과 희로애락이 담긴 것 같다. 이제껏 살아보니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희로애락이 전부더라.”
 
─ 당시는 요즘과 달리 해외를 마음대로 오가기 힘든 때 아니던가? 

“학교 덕분에 다녀올 수 있었다. 이대에서 10년 이상 재직한 교수 대상으로 미술교육시찰, 재료수집 등을 위해 베풀어준 기회였다. 경비나 비자도 학교에서 도와준 거다. 이때 파리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북유럽, 멕시코 등 장장 20곳 넘는 나라를 5개월간 일주했다. 이때 여행 쏘다니며 풍경 곳곳을 스케치로 많이도 그렸다.”
 
─ 짧지 않은 기간에 홀로 여행이라니. 별의별 일을 겪으셨을 것 같다. 

“반벙어리 행세하며 넉살도 좋게 이 나라 저 나라를 넘나들었다. 혼자였지만 외로움을 달래주는 미술작품이 있었으니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밀라노에서 꿈에 그리던 베네치아로 넘어간 날, 터미널에서 택시를 찾으니 주변 사람들이 날 보고 웃던 기억이 난다. 죄다 모터보트나 곤돌라뿐인 곳에서 택시를 불러댔으니 동양 촌놈이 왔구나 하는 눈치였다. 여행 다니면서 어딜 가나 스케치를 했는데, 베네수엘라에서 왔다는 여행객이 내 스케치를 팔라고 조르는 통에 난처했던 적도 있다. 그래서 급한 대로 그 여자 얼굴을 그려주고 모면하기도 했다. 힘든 일보다도 추억담만 떠오른다.”
 
채 완성하지 못한 삐에로 그림이 이젤 위에 있다. 100세의 나이에도 이준 화백의 작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른편 벽에 걸린 그림은 1973년 세계 여행 당시 그린 스케치. /임영근 기자
 
─ 지난 5월까지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상수기념전 ‘빛의 향연’을 대규모로 가졌다. 회화 150여 점, 스케치 160여 점, 도합 300점 넘게 출품한 대형전시였는데,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벌써 100세라니… 너무 오래 살았다.(웃음) 하늘이 내린 직업이 아니고서야 이때까지 그림을 계속 할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든다. 석 달하고도 열흘을 보태 열린 큰 전시였는데, 내 생애 다시없을 영광이지 않을까. 내 작업의 전 연대를 보여줄 수 있었기에 참으로 보람된 자리였다. 이때 출품한 대작들 대부분 우리 집에 보관한 건데, 막내아들이 꼼꼼히 관리를 잘한 덕분에 공개할 수 있었다.”
 
─ 그야말로 현역이다. 상수기념전에 이어 10월 대구 피앤씨갤러리에서 개인전, 자하미술관에서의 김병기, 장리석 등과 함께한 그룹전 ‘백세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때보다 활발히 활동 중이신데. 

“지금껏 작품 하는 데 불편함 없도록 내자와 자식들이 많이 도와줬다. 도움이란 것이 별거던가? 가정 화목하고 가족 모두 건강히 탈 없이 함께 해주는 게 최고 아닌가. 물론 지금까지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 올해 상수라는 반가운 핑계가 생겨 여기저기서 좋은 전시가 마련될 수 있었다.”
 
─ 개인전 10여 회. 그룹전에 비해 개인전을 많이 갖진 않았다. 횟수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좀 아쉽다. 

“대개 작업에 가장 매진할 시기로 꼽는 때에 나는 이대 미대 교수로 30년을 지냈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후진양성에 몰두하니 마음처럼 개인전 갖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작가의 생명이라고 하면 작품을 발표하는 데 있는데, 교단에 서며 내 성에 차는 작품을 꾸준히 내보이는 게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이지.”
 
1970년대 이 화백의 초기 색면추상부터 1990년대 기하추상화까지 아우른 개인전이 지난달 31일까지 대구 피앤씨갤러리에서 열렸다. 사진 속 작품은 각각 1993년(왼쪽), 1992년 제작됐다. /피앤씨갤러리
 
─ 경남 남해에서 나고 자라셨다. 자연을 향한 애정을 바탕으로 추상화를 그려왔는데, 어릴 적 봤던 산천초목과 그때의 기억에 영향을 받은 건가. 

“예전에 경남 남해라고 하면 유배지였다. 요즘에야 다리가 있어 관광객도 많이들 찾아오지만 원래는 나룻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던 곳이다. 그렇게 사람 발길 닿기 어려워 그런가 아름답기는 어쩜 그리 아름다웠는지. 김구(金絿)나 김만중이나 모두 남해로 귀양 와서 그곳을 배경으로 ‘화전별곡’과 ‘구운몽’을 남기지 않았던가. 나는 그런 절경이 지천에 깔려있었으니, 이를 보고 자란 기억이 캔버스에 부지불식간 표출된 듯하다. 햇살이 비추는 바다의 빛깔과 아름다운 섬의 풍경이 아직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자타공인 최고의 개구쟁이로, 자연과 부대껴 노는 걸 그렇게나 좋아했다. 나무에 기어오르지 않나, 여자아이들 울리는 데에는 얼마나 선수였던지. 체구는 왜소해도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운동신경으로는 부러울 자가 없었다. 키는 이리 작은데도 농구, 축구, 유도… 못하는 게 없었다.”
 
─ 그렇게 뛰놀기를 즐겼는데 어쩌다 정적인 미술에 빠지게 됐나? 

“아침저녁으로 산을 오르고 이곳저곳 싸돌아다닌 탓에 산천 풍경을 많이 접했다. 10살이나 됐을까. 맨날 보고 구경한 게 자연이라 그림을 그리더라도 꼭 논두렁, 바다, 하늘, 초목 따위를 그리게 되더라. 장난삼아 취미 삼아 그린 고향 풍경 그림을 우리 아버지가 보시더니 재주가 있다며 동네방네 자랑을 하러 다니던 기억도 난다. 옛날에는 환쟁이라고 하면 아주 미천한 직업이었는데, 아버지는 도리어 나보고 그림을 하라고 적극 지원해주셨다.”
 
─ 단순한 풍경 재현이 아닌, 자연을 띠, 원, 삼각, 사각 등의 순수 조형요소로 추상화를 그렸다. 

“폴 세잔은 ‘자연은 원형, 구, 원추로 이뤄진다’고 했다. 난 그 요소를 평면화해 삼각, 사각, 동그라미 등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내 나름대로 재조직을 한 거다. 남은 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연을 그려내고 싶었다.”
 
─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기하추상에 천착했다. 다채롭고 풍부한 색면과 도형적인 조형성은 지금 시각에서도 아주 정교하고 현대적이다. 

“그런 그림 그려대니 당시에는 주변에서 생소해하고 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모른다고 해야만 정확한 대답이었을 거다. 작품이란 남들이 하지 않은 걸 하고 세상을 앞서가야 하니까. 우리 전통 돗자리나 화문석 등 여러 공예품들 보면 난 한국인은 천부적으로 예체능 기질이 뛰어난 민족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장인정신을 갖고 세밀한 붓질에 집중력을 쏟고 싶었다. 서양인은 따라올 수 없는 섬세함이랄까. 기하추상은 고도의 집중과 끈기가 필요하다. 50년 전에는 생소했는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공감을 일으키는 작품으로 자리 잡아갔다고 자평하고 싶다. 곁눈질로는 절대 오래 갈 수 없다. 상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감상의 자유, 재료의 개방 이 네 개 원칙을 준수하고 이에 입각해 창작생활을 이어왔다.”
 
─ 1980년대 접어들면서 화면과 구획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 같은데. 색면 대비도 뚜렷하다. 변화한 계기는 무엇인가? 

“별다른 계기라기 보단 같은 주제로 작품을 계속 이어가다 보니 자연발생적으로 그런 스타일로 변화했다.”
 
<08-월영> 164x219cm 캔버스에 아크릴 1992 /피앤씨갤러리
 
─ 대작을 많이 작업하신다. 특별한 이유? 

“300호짜리도 심심치 않게 했고 150호나 200호 크기는 수도 없이 많이 그렸다. 내가 체구가 참 작다. 스스로 오척단구의 몸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키가 작다고 작은 그림만 그려야 하겠는가? 작은 몸으로 어디 가서 지기 싫으니 더더욱 대작을 많이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김환기 화백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들었다. 함께 어울리던 때를 회고해주신다면? 

“김환기 선생 내외가 거처가 마땅치 않아서 우리집 다락방을 내어주기도 했었다. 꽤나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았다. 가족도 그런 가족이 없었지. 우리 아들, 딸 이름도 다 김 선생이 지어줬을 정도니. 그런데 정작 그의 그림은 갖고 있는 게 없다. 그는 예술가적 기질이 아주 강했다. 잘 알려진 대로 부잣집 아들이었고 얼마든지 편히 살 수 있었을 테지만 내가 보기에는 부와 예술을 맞바꾼 것 같다. 아들 없이 딸만 셋이라 김 선생 모친이 후계자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이대 미대 서양화과 제자인 황주리 작가가 이 화백의 미수(米壽)에 장수를 기원하며 선물했다는 돌에 그린 그림이 거실에 놓여있다. /임영근 기자
 
─ 개인 컬렉터에 작품을 판매하기보다 미술관 전시를 선호하며 되도록 많은 이들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중시해왔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봤을 때 아쉬움 남는 건 없나. 

“없다. 내 천직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니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 운이 좋아 교직에 오래 있었고 그 덕분에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않고 작품가로 양명하겠다는 과욕도 도외시하고 지냈다. 그저 항상 신인 같은 자세로 새로운 모색을 이어갈 뿐이다.”
 
─ 어떤 화가로,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으신지.
“끝까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창조해온 작가로 남고 싶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