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도 허구도 아니다… 허산의 ‘제3의 지점’

  • 아트조선 윤다함 기자

입력 : 2018.11.13 23:48

벽에 엉겨 붙은 청테이프, 콘크리트 속 숨겨진 도자…,
정교한 조각으로 공간을 하나의 대형작품으로 전환
‘일상의 특이점들’展, 내달 2일까지
 

지난 8일 개인전 ‘일상의 특이점들’이 열린 가나아트 한남에서 만난 허산 작가. /아트조선
한바탕 소동이라도 휩쓸고 간 걸까. 전시장 바닥에 콘크리트 파편과 구겨진 종이컵 따위가 널려 있다. 천장을 받든다는 기둥은 가운데가 후벼파여 간당간당한 게 아무래도 곧 무너질 모양새다. “전시 한다더니 전시장 꼴이 왜 이래?”

허산(38)은 건축적 요소를 활용해 공간 구성에 직접 개입하거나, 일상용품을 그대로 본떠 익숙한 듯 낯선 상황을 연출한다. 부러지기 일보 직전의 기둥이나 꾸겨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종이컵 모두 그의 작품. 이에 관람객은 깜빡 속는다. 가까이 다가가서 봐야 설치된 작품이라 알아챈다.
 
이렇다 보니 뭐가 작품이고 뭐가 아닌 건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 시점을 두고 특이점이라 지칭한다. 증폭하는 의심으로 기존 인식이 바뀌는 지점을 뜻하는데, 물을 끓어오르게 하는 끓는점이 존재하듯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는 촉매, 즉 특이점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번 전시명도 ‘일상의 특이점들(Singularities in Daily Life)’이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전시공간을 실재도 허구도 아닌 제3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싶었다고.
 
“보면서도 작품인지 아닌지 계속 의심하게끔 만듭니다. 작품 앞에서 멈칫멈칫하면서 이쪽에서 봤다가 저쪽에서도 봤다가 하는 그 행위가 곧 인식이 전환되는 특이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때부터는 뭘 봐도 자꾸 의구심이 들걸요?” 작가의 말마따나 이전 같았으면 쉽게 지나쳤을 광경이나 물건도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다. “일상의 예술화, 예술의 일상화라고나 할까요?” 
 
(좌)< Broken Pillar > 31x31x286cm 2018, < The Torn Cup > 11.3x11x7cm 11x19x6.5cm 3.5x8x5.5cm Bronze 2018 /가나아트
 
<Tape>는 생김새도 질감도 영락없는 박스테이프다. 벽에 엉겨 붙은 것까지 섬세하게 표현해 브론즈로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 “설마 이것도 브론즈로 만든 거냐고 묻게 하고 싶었어요. 0.01mm로 캐스팅해야 했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기도 했고 제겐 새로운 도전이었죠.” 허산은 주로 브론즈를 사용한다. 즉흥적으로는 다룰 수 없는 물성과 계획적이고도 오랜 시간을 쏟아야 하는 특성이 본인의 성격과 잘 맞는단다. 서울대 조소과를 다닐 때부터 금속을 즐겨 썼다. 
 
<Broken Pillar> 시리즈는 브론즈로 만들어지지 않지만 허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번 전시에도 신작이 출품됐다. 전시장 천고에 딱 들어맞는 콘크리트 기둥 작품이 감쪽같아 보이지만, 여느 기둥과 달리 한 귀퉁이가 크게 떨어져 나갔고 그 안에는 도자가 숨어있다. 어릴 적 경주에 살았던 허산은 흙장난하려고 땅이라도 팔라치면 기와나 도자 조각 같은 게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경험을 한다. 숨은 보물을 발견하듯 땅속에서 꺼낸 도자 조각은 오늘날 땅속이 아닌 작가의 기둥 속에 묻혔다. 이번 출품작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산 도자를 파묻었다.
 
작가는 건축의 기본요소인 기둥을 건드림으로써 충격과 긴장을 유발한다. 균열되고 파손돼 위태로운 뼈대에 관람객은 주춤하지만 이내 작품이고 허구란 것을 깨닫곤 일면 안도한다. 그러나 금세 부러질 것 같은 그 기둥은 눈앞에 실재하기에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관람객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렇듯 감상자가 직접 인지하고 경험할 때 허산의 작품은 비로소 작동된다. 조각을 전공한 그가 건축적 작업을 시작하게 된 건 학부생 때였다. “한 갤러리 앞을 지나다 공사판처럼 연출한 설치작품을 맞닥뜨리곤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안전모를 쓴 아저씨가 나타나 대뜸 한소리 하셨죠. 공사하는 데 걸리적거리니까 비키라고… 작품이 아니라 진짜 공사장이었던 거예요.“
 
벽에서 뜯어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청테이프의 질감과 광택을 브론즈로 재현했다. < Tape No.3 > 42x18x11cm Bronze Plywood 2018 /가나아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잔해들이 관람객의 발에 치인다. 이것조차도 작가의 의도다. “이 작품(Broken Pillar)을 구매하면 바닥에 있는 콘크리트 조각들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니 기둥과 함께 포장해드립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신진 가나아트 큐레이터의 설명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내달 2일까지 가나아트 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