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ist] 뒤샹(Duchamp)과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처럼 새로운 본질을 만나고 싶다.

  • 아트조선

입력 : 2018.10.10 14:17 | 수정 : 2018.10.11 15:33

안재영 미술평론가(광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학과 교수,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요즘 비엔날레가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과거에 비해 비엔날레가 유형·무형의 재물과 서비스를 상품화시켜 이윤을 취하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비엔날레를 통해 미술을 느끼고 향유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상품화되면서 지역 본연의 문화의 가치가 왜곡되는 지나친 상업화로 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큰 장소에서 큰 자금으로 움직이는 비엔날레 행사가 보여주고자 하는 능력만 비축하는 것 같다. 비엔날레의 기본 특성이나 본연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경영수완을 보여주고 자랑하는 거대한 화랑이 되어간다.
미술이라는 장르가 작가 본연이 알아서 표현하지만, 비엔날레 같은 행사는 매번 주어진 선임된 감독이나 큐레이터 등 기획자의 시각과 기준에 의해 작품들은 선정되어진다. 이를 통해 기획자들은 자기들의 관심사를 연출한다고 볼 수 있다. 감상자 입장에서 보면 미술에서 일등이 없다. 달리 말하면 미술이라는 종목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음악, 체육은 대체로 일반인들도 평가 가능하다.

20세기는 공통적으로 의식의 큰 변화가 있었다. 더불어 인간은 작품을 바라보고 몰입되어 즐거움과 위로의 생각을 받을 수 있다. 사실 한 작가의 작품을 기술로 볼 것인가 아님 사회적인 시대적인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의 설명적인 해설이 필요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얼마 전 조선일보 미술관 전시장에서 이중섭미술상 1회 수상자인 황용엽 작가는 “내 그림은 그냥 그림으로 끝내고 싶어! 어렵게 보려 말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보고 가면 되는 거야”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술 지식이 없으면 감상자들이 일반인들이 작품을 헤아리기 힘든 것이 미술 현실이다. 음악, 체육, 영화는 우리가 분석하고 환호하고 평가도 한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학습하지 않고는 솔직히 난해하고 어렵다. 대체로 전문가의 말이나 타이틀에 의해 마음이 움직여지고 스스로 감상을 판단하기 어렵고 잘못하면 최고의 정답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베토벤도 있지만 봄의 소리 왈츠의 요한 슈트라우스나 프레데리크 쇼팽의 왈츠가 있는 것처럼 대중이 다양하게 무언가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데 비엔날레의 역할이 무언가 미술사적으로 잘 뽑아내야 하는데 거대해지고 진부해진 것만 같다. 그래서 점점 여기저기의 비엔날레에 대한 인식들이 그것이 그것 같아 애정이 식어간다.
<천민정> 초코파이 함께 먹어요( Eat Choco Pie Together )/부산비엔날레 제공
한국도 20여 개의 비엔날레가 난립하고 세계적으로도 300개가 넘는다. 처음의 비엔날레 취지처럼 무언가 미술사적으로 변화된 담론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일관되게 제대로 찾아 내야 하는데 겸손을 위장 삼아 은근히 ‘이 작가 내가 키웠어!’ ‘이 사람 내가 알아!’ 위세를 떨친다. 사실은 돈 잔치보다 저 깊은 속에 우물 속에 숨어있는 잘 모르는 작가들을 선발해야 한다. 예술은 자금이 많으면 또는 페기구겐하임 같은 인물로부터 자금의 후원을 잘 받으면 작품의 스케일이 커지고 좋은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비엔날레의 경영이 국가적으로는 미술사적으로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얼마나 효율적으로 했는지도 앞으로 평가되어 그에 응당한 처벌도 필요하다. 충분한 숙고 없이 개념만 앞세워 전시를 치러내어 급급하고 미술인들의 중론이나 대안성을 찾기 어렵고 국제비엔날레의 상투적 문법만 극대화했다는 것으로 요약되어서는 안 된다. 그럴 바에는 오히려 매 비엔날레에 쓰이는 백억, 이백억 자금을 잘 모아 에펠탑을 하나 건설하는 것이 지역경영에 더 좋을 것 같다는 우스개 생각도 해본다. 더불어 비엔날레를 유치하고 있는 각 지자체는 이야기를 간직한 낡고 버려진 장소를 찾아 유휴 공간 활용계획을 입체적으로 편성하거나 잉여공간을 활용한 복합문화예술시설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시켜 지역 발전에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방치된 건축물의 단순한 복원을 넘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예술 명소로 탈바꿈시키는 프로젝트들이 ‘업사이클링’ 되어야 한다.
빛의 벙커(Bunker de Lumières)전시전경/ CulturespacesErik Venturelli 제공
장소를 잘 찾아내어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에 흙과 나무로 뒤덮어 산자락처럼 보이도록 위장되었던 비밀 벙커를 오는 11월 프랑스 컬처스페이스(Culturespaces)와 한국 IT기업 티모넷(Tmonet)이 합작하여 빛의 벙커로 탄생시킨다.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이미지가 버려진 비밀 벙커벽과 바닥, 천장을 채우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뒤덮인 벙커에는 그림과 어울리는 음악이 만난다. 제주 프로젝트가 추진될 성산지역 벙커는 KT가 1990년 국가 기관 통신망을 운용하기 위해 설치했던 시설로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지하 공간이다. 이 벙커는 높이 10m, 넓이 900평 규모로 자연 공기 순환 방식을 이용해 연중 16℃의 쾌적한 온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고, 벌레나 해충도 없고 외부의 소리 또한 완벽하게 차단되어 시공간적 몰입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전시 요건을 갖춘 최적의 장소로 평가되었다.
빛의 벙커(Bunker de Lumières)전시전경/ CulturespacesErik Venturelli 제공

비밀 벙커의 연출은 감성적인 서비스 시스템이다. 이 같은 작업은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르고 120개의 비디오 프로젝터, 최첨단 음향 시스템과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해야 하고 단순한 프로젝션 맵핑이 아니기 때문에 장소의 특수성, 아티스트의 창의성, 다양한 장비를 이용한 프로젝션과 음향 기술이 필요하고 오페라 미술감독, 음악가, 미술가, 미디어 아트 전문가 등이 다양하게 고려되어 투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는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기존 미술 전시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이었다면, ‘빛의 채석장’에선 사람들이 이미지로 채워진 공간을 직접 걸어 다니며 예술을 체험한다. 전시를 보며 눈물 흘리고 그림이 주는 감동을 느낀다. 우리들에게 잘 흡수될 수 있도록 다양한 감각을 통해 제대로 보여주든지 아니면 그에 응당한 비엔날레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광주비엔날레전시관전경/광주비엔날레 제공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광주비엔날레의 현장들을 돌아보면 전시 섹션 대부분은 기존 비엔날레의 연출 스타일을 답습한 것들로 작품이나 메시지는 잘 보이지 않고, 전시의 규모와 기획진의 인맥 같은 전시 외적인 요소들이 더 부각되면 경영 수완만 제대로 보인다.
기획자가 여러 명이고 현재 입장객 수가 얼마 들어왔다고 평가를 내린다. 이처럼 역대 최대 규모의 다양한 장소에서 전시한다는 업적평가와 경영수완만 보이지 솔직히 미술사적으로 센세이션이 없다. 기존 스타일 답습 정도지 전문가들을 설득할 큰 메시지가 없다.
잘 정리된 세계적인 미술관도 아니고 금번 비엔날레의 전시 피로감은 초대형 규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지 않은 주제와 산만하고 다닥다닥한 디스플레이도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 고유의 기운이 훼손됐다. 개념적인 주제를 11명의 큐레이터가 7개의 주제로 나눠 전시하다 보니 주제가 반복되고 더 개념적으로 쪼개져 전체적으로 산만했다. 비엔날레 전시가 스스로 관객을 제한되게 만들어 연결고리를 흡수하기가 힘들다.
비엔날레의 특징이자 한계라고 용인하고 넘어가기에는 주제는 모호·난해하고, 작품은 너무 많고 전시는 불친절했다. 욕심은 있고 보여주려는 포장과 경영수완 등 너무 외적에 치우치다 보니 일반 관객들에게 더 새롭고 많은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욕심을 부린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보여주기 전시에 치우쳤다. 작가명과 작품설명도 어떤 작품을 지칭하는 건지 설명을 들은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간 배치가 난해했다. 아시아문화전당보다 주 전시장인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은 너무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들어차 오히려 관람 욕구를 떨어뜨린다. 일반인들을 의식해야 하는데 너무 전문가를 의식한 경향에서 나오는 심리 전시다.
< Joseph Kosuth > Um e Três Pás 1965
비엔날레는 특성을 잘 지켜가며 미술사적으로 새로운 본질들을 제대로 보여줄 작가 또는 이슈를 만들어내야 한다. 동시대 미술이라는 것은 그림하나 잘 그린 것이 전부도 아니고 그림 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지만 오늘날에 담론이 형성하고 비엔날레라는 무대에 큰 역할을 한 미술작가는 무수하다. 더불어 현대미술에서 마르셀 뒤샹(1887~1968)과 조셉코수스(1945~)작가를 빼고 논하기 힘들다. 변기 갖다 놓고 예술! 의자 갖다 놓고 예술! 아이디어가 곧 ‘개념미술’이라고 한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동시대 미술이 해석되고 그들의 분신들이 미술시장에서 정당화된 것이다.
< Marcel Duchamp > Fountain 1917,1964
이들은 예술작품이 조각이나 그림처럼 아름다운 어떤 것이라고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것도 미술이 되고 아이디어가 곧 작품이다. 라는 미술사적 변화를 심어줬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가장 큰 흐름을 이루고 있는 개념미술이다. 프랑스계 미국인 미술가 마르셀 뒤샹은 1917년 4월 뉴욕의 한 전시회에 리처드 무트라는 가명으로 ‘샘(Fountain)’이라고 이름붙인 남성 소변기를 변기를 갖다놓고 예술품이라고 우기고 수학공식을 그려놓고 '작품'이라고 한다. 샘에서 솟아나오는 물이 배설되는 종착점인 변기에 깨끗한 물의 시작점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여해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을 예술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개념미술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이 센세이셔널한 사건 이후 콘크리트처럼 굳건했던 미술의 정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미술은 회화든, 조각이든 예술가의 숙련 끝에 나오는 창작물이었다.

< Joseph Kosuth > One and Three Chairs 1965
또한 마르셀 뒤샹을 아는 사람이라면 조셉 코수스를 알아야 한다. 뒤샹에 이르러 기성품(오브제)도 작가의 의도에 따라 미술 작품의 지위를 얻었다. 미국 작가 코수스는 뒤샹의 생각을 발전시켜 1960년대 개념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뒤샹의 영향을 받은 미국 개념미술가 조셉 코수스의 1965년작 <One and Three Chairs>을 보면, 작품의 기본적 요소로 언어를 중시했던 코수스는 실제 의자, 의자를 찍은 사진, 의자의 사전적 정의를 나란히 진열한 작품으로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의자일까’라고 물으며 기존의 미술에 대한 개념을 전복시켰다.
<One and Three Chairs>는 예술가인 코수스 본인의 내면세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예술가 자신만의 고유한 손작업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 선택과 배열만이 있을 뿐이다. 작품은 실제 의자와, 의자의 사진, 그리고 의자를 설명한 개념(글), 이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코수스는 왜 하나의 의자를 세 가지로 나눠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일까?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진짜 의자는 지각의 대상이다. 반면,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로서의 의자는 상상의 대상이며 사전적 의미의 의자를 확대 복사해서 언어로 설명한 의자는 사유의 대상이다. 이 세 가지를 한 자리에 놓음으로써, 사물과 이미지와 개념을 관통하는 ‘그 무엇’을 작품 안에서 보여주고 있다. 즉, 코수스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존재하는 모든 이미지들, 또한 존재하는 모든 언어적 정의들 간의 관계를, 의자를 이용한 환유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개념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관객의 활발한 사유 활동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의 독특한 감성이 녹아있는 유명화가의 그림을 감상하며 넋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수스의 작품은 유명화가의 그림과 달리 넋을 잃고 감상하기 힘들다. 사회적 코드에 얽매여 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며 ‘재현이란 무엇인가?’ ‘미술이란 무엇인가?’ ‘의자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셉 코수스의 작품에서 의자는 매개체를 종래의 예술에 대한 관념에서 재현된(사진)의자라는 대상을 실물, 그림, 언어를 이용하여 작가의 선택을 한 자리에 모아 배열해 놓음으로서 사물과 재현 이미지, 언어의 개념 관계를 제시한 작품이다.
< Felix Gonzalez-Torres > Untitled 1991 Billboard
‘무엇을 재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제시는 다다이즘의 마르셀 뒤샹 이 후 예술은 개념이며 예술은 더 이상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갖고 있는 예술의 개념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현대미술은 갈수록 개념화되고 대형화되었다. 정교한 붓질보다 개념적 의미의 설치미술과 미디어, 퍼포먼스 혹은 아이디어가 더 많은 관심과 이슈가 되었고 컨템퍼러리 아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과 영역까지도 흔들리는 멈출 수 없는 가속도로 현실(가상현실)을 앞서가는 무책임한 논리와 담론에 부딪혀 있다.
모더니즘의 초기, 뒤샹의 작품 세계에서 선보였던 레디메이드가 왜 중요한지 알아보고 그 가치를 다음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다. 암튼 개념미술은 사물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대신 단어나 문장 등의 텍스트를 이용해 미술 작업을 하고 미술 작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아이디어일 뿐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형태에서 개념으로의 전환이 모던 아트의 시작이고 개념 미술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람자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비엔날레 현장에서 미술에서 개념 자체가 중시되다 보니 개념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인 텍스트 자체가 미술이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색과 형태가 아닌 의미와 개념을 좇는 게 개념미술이다.모더니즘까지의 미술은 회화, 조각, 사진 등 매체별로 자신의 한계와 씨름해왔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어떻게 작품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이와 같이 일반인들에게 감상자들에게 비엔날레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향유하고 소통되어야 할지 사뭇 궁금하다. 상업화도 장소도 자금도 중요하지만 미술사적으로 마르셀 뒤샹과 코수스처럼 새로운 본질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싶은 것이 좋은 정답이 아닌가 싶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을 받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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