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을 연습하는 연습의 과정

  • 아트조선 윤다함 기자

입력 : 2018.10.02 17:39

제17회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수상작가 오민
“도달할 수 없는 완성일지라도… 끝없이 연습”

 
연습, 그것은 완벽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그 완벽의 순간은 무대 위의 연주일 수도, 춤일 수도, 공연일 수도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꿈꿔온 그 순간은 찰나이기 마련이지만, 그 일순을 위해 수천, 수만 번 반복해왔던 그 ‘연습’은 정작 무대에 오를 일이 없다.
 
오민 작가가 자신의 영상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연습연 A> 10분21초 단채널영상, 4채널 오디오 2018 /에르메스코리아
 
본래 피아니스트였던 오민(43)은 어렸을 적부터 연주자로서 수없는 연습과 연습을 거듭했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고 이를 상상하고 그리며 연습을 반복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기술과 능력을 갈고 닦는 이 연습은 ‘연습곡’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연습곡은 간단한 아이디어를 재료로 작곡한 짧은 악곡으로, 기교 연습을 위한 교본인 셈.
 
오민은 완벽의 순간이 아닌, 이를 향해가는 연습의 과정과 연습곡을 화두로 삼아 신작 <연습연 ABCD>을 내놓았다. 다소 낯설기도 한 ‘연습연’이란 용어는 음악 연주 기술을 연습하기 위한 연습곡과 무용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 추는 연습무에서 착안해 오민이 직접 만든 것. <연습연 ABCD>는 공연자들이 인식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실험한 영상작품이다. 오민은 공연자의 시선과 눈동자의 움직임이 공연자의 인식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공연을 위해서는 ‘인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저는 연주 기술이 신체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표현하거나 사유하거나 태도를 결정하는 것까지 확장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연은 공연자가 무대 위에서 인식하고 결정한 것의 결과물이고, 따라서 무대 위에서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동시대 공연자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기술이라는 겁니다. 이에, 인식하는 기술을 연습하기 위한 <연습연 ABCD>을 만들었고, 이는 연습곡에 관한 연구, 기술과 연습에 관한 사유, 인식과 공연자의 태도에 관한 질문들을 포함합니다.”
 
작품마다 늘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해온 오민의 그것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곤 했다. 지난 작품을 통해 공연을 구성하는 요소와 그 관계, 관련자의 역할과 태도, 무대 밖의 공간과 시간의 요소들을 관찰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아이디어나 질문을 영상이나 공연을 구성하는 재료로 사용해왔다. 그리고 이번 신작 역시 그 연장선에 있으며, 전작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변화와 시도가 엿보인다. 제17회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수상자인 그와 수상기념전 <연습곡(Étude)>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연습연 C>의 스틸컷. 영상 속의 퍼포머는 생각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보는 기술을 연습하고 있다. <연습연 C> 10분21초 단채널 영상, 2채널 오디오 2018
 
─ 두산연강예술상(2015), 송은미술대상 우수상(2017)에 이어 제17회 에르메스재단미술상을 수상했다. 소감 한마디?
“작가에게 지속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지난해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수상 이후 약 1년6개월간 작업 주제를 구상하고 제작하고 또 전시할 기회를 얻었고, 또 그 과정에서 파리 레지던시에 체류하며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수상의 의미가 크다.
이번 수상과 전시와 관련해 정말 많은 질문을 받았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작업을 보는 각기 다른 눈과 인식의 방향이 담긴 질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나 역시 질문에 맞춰 내 작업을 새롭게 바라보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한 구절을 수없이 반복하던 피아노 연습 장면이 떠오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연주에서의 반복 연습이 기계적으로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동안 주체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고 또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느꼈던 것 같다. 덕분에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연습을 한 기분이다.“
 
─ 시선을 곧 인식으로 여기고, 이를 기조로 이번 신작을 전개했다. 시선-인식의 관계와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인식하는 기술을 연습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생각했다. 관찰─인지─기억─상상─계획─예상─판단을 포함하는 인식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과 관계하며, 내 몸의 바깥 세계와 내 생각 속의 공간을 모두 사용한다. 그리고 보는 행위와 직결된다.
예컨대,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과거의 장면을 떠올리거나 예상하기 위해 미래의 일을 머릿속에 그려보지 않나. 때때로 복잡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으로 생각의 조각들을 맞추며 큰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내 몸을 둘러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그것이 내가 과거에 이미 본 것, 즉 기억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앞으로 내가 볼 것 혹은 예상과 어떻게 다른지 구분해보기도 한다. 이렇듯 각기 다른 인식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은 달라질지라도 보는 행위는 공통된다.”
 
<연습연 ABCD>는 △지금 여기의 공간과 시간에서 현재를 보는, 관찰 인지를 담은 <연습연 A> △생각의 공간에서 이미 과거에 만든 이미지를 보면서 기억하고 미래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보며 계획, 상상, 예상하는 <연습연 C> △현재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이미지를 함께 보며 결정을 내리는 판단을 담은 것이자, 지난 9월 5일 전시오프닝에서 진행된 라이브 퍼포먼스 형태의 <연습연 D> △이 모든 것의 연결 고리이자 일종의 연보이자 지시문으로 작동하는 <연습연 B>로 구성된다.
 
<연습연 B>는 <연습연 AC>의 지시문(스코어)이다. <연습연 B>의 모니터에 뜨는 지시문에 맞는 행동이나 표정을 <연습연 AC>의 퍼포머가 그대로 이행한다. <연습연 B> 2분19초 5채널 영상, 무음 2018 /아트조선
 
─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고 또 전공까지 했다. 피아노는 오민이란 사람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출품작에서 음악은 들을 수 없고 생활 소음에 가까운 소리만 반복되는데, 이러한 장치의 역할과 의도가 궁금하다.
“피아노 연주를 더는 하지 않는 지금, 그리고 ‘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래도록 질문해 온 무용가들의 생각을 배운 지금, 나는 음악의 소리보다 연주자의 몸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연주자들은 소리를 먼저 상상해서 그 소리를 만들기 위해 몸을 쓴다. 몸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우는 연습 과정에서는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날카롭게 인식하겠지만, 계획한 대로 몸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숙련 후 무대에 오르면 몸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흐려진다. 무대에서는 몸이 음악을 따라 자연스럽게 자동으로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음악의 흐름을 쫓다가 갑작스레 몸의 움직임을 인지하는 순간 집중력이 무너지기도 한다.
나도 눈을 감고 연주 중 우연히 눈을 떴다가 악보가 생각나지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결국 소리와 음악은 몸이 움직였기 때문에 나온 결과다. 나는 미술가로, 음악뿐만 아니라 어떤 소리든 그 소리가 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에 관심이 있다. 악기가 작동하는 방식 외에도 몸이 작동하는 방식, 몸이 작동하기까지 연주자가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관찰하는 것이 내게 더욱 중요해진 거다.
따라서 음악 소리보다 몸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소리가 내겐 더 흥미롭다. 동시에 이 소리가 음악이 아닌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동물, 식물, 사물, 물, 공기 등 정지를 포함한 움직임을 잠재한 모든 것이 내 작업 속에서는 몸이 될 수 있다.”
 
<연습연 A>를 구성하는 열두 가지 장면에서 공연자가 각기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힌트는 오직 소리뿐. 소리는 몸이 움직인 흔적과도 같다. 현실 공간에는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 몸에서 발생한 수많은 소리가 섞여서 존재한다. 자동차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이웃이 속삭이는 소리, 빗소리, 발소리, 잎사귀가 부딪히는 소리, 옷과 몸이 맞닿는 소리까지…. 이런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기도 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소리들은 우리의 두뇌에서 편집되는데,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로 선별해 듣는 것이다. 이번 작품 속의 사운드는 1차적으로 오민이 직접 선별한 몇 가지 소리로 구성되며, 관객은 이를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그 소리를 다시 한번 스스로 선별해서 듣게 된다.
 
작품 앞뒤로 총 7개 큐브가 마련돼 있다. 의자 위치와 방향은 작가가 의도한 것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표정은 맞은편 관객에게 또 다른 관람요소가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관람객은 자연스레 작품 일부가 된다. /에르메스코리아
 
─ 이번 전시장 내 의자 배치와 그곳에 앉은 관람객의 표정을 작품 일부로 녹이며 그들의 반응에 관심을 뒀다. 본인 작품이 일면 난해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을 내놓으면서 관람객의 반응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관람객, 공연자, 그리고 작가의 행동과 태도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 관계를 관찰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창작의 단계나 그것을 실행하는 단계 또는 그것을 감상하는 단계에서 동일한 행위가 관찰되는데, 그중 가장 관심이 가는 건 바로 ‘보는 행위’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행위가 모두 인식으로 연결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관객 역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인식을 연습하고, 보는 것을 연습하는’ 작품 속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소통은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질문을 쫓아 연구하지만 연구를 통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진 않으며, 연구는 새로운 발견 혹은 새로운 가정을 목표로 할 뿐이다. 이때의 발견이나 가정은 작업 속에서 새로운 형(形)을 만드는 단서가 된다. 작품은 연구가 특정한 형으로 일단락된 상태며, 주로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품고 있다. 작품을 구성하는 형은 소위 말하는 소통에 유용한 언어가 아닐 수 있다. 나는 그 형이 소통을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형태로 치환되거나 변환되지 않고 그냥 그 자체의 생김대로 소통하기 원한다.
내 작품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난 이해하기 쉬운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내 작업이 유독 더 난해해 보인다면 그건 시간과 추상성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한다.“
 
─ 숱하게 받은 질문이겠지만 그래도 직접 묻고 싶다. 왜 미술로 전향했나?
“고전 음악 연주자는 문헌 연구자와 같다. 연주자가 해석하고 연주하는 문헌은 19세기 혹은 그 이전에 집중돼 있고, 연주자가 의지를 갖고 현대 음악을 연주해도 그래봤자 20~30년 전 작곡된 음악일 확률이 높다. 문헌 분석 후엔 해석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몸을 어떻게 쓸지 계획하고 몸에 익을 때까지 부단히 반복한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어도 근육과 관절을 아주 정교하고 정확하게 움직이기 위해 체육인처럼 신체적이고도 반복적인 훈련을 계속해야만 한다. 특히 연주 연습은 기본적으로 소음이 발생하기 때문에 연습은 물리적으로 독립된 혼자만의 공간에서 진행된다. 결국 연주자는 시대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지금’과 ‘여기’로부터 거리를 갖게 된다. 나는 이 간격이 답답했고 그러한 거리감을 자유롭게 조절하고 싶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술 영역으로 들어왔다. 미술에서는 음악의 원리, 현대 무용이 몸을 바라보는 방식, 형태, 색, 시간, 소리, 등 저를 자극하는 모든 것에 대해 종합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또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거리를 내가 직접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
 
 
─ 향후 계획이나 예정된 전시가 있다면?
“현재 공연을 만들고 있다. 지난 1년간 나를 많이 고민하게 만든 한 음악(줄리아 울프 ‘릭’)에서 출발해 그 음악을 연구하며 발견한 질문들이 있다. 나는 이 물음들을 특정 음악에만 해당하는 게 아닌, 공연을 만들고 실행하고 감상하는 과정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질문으로 전환해 공연을 구성 중이다. 다가오는 11월 24일과 25일 아트선재센터에서 공연 예정이다.”
 
 
연습의, 연습에 의한, 연습을 위한 오민의 작업 세계에서 완성, 종착지란 존재할까? “완성, 완결, 완벽은 결국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럼에도 완성에 이르려고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것, 종결을 선언하는 것, 어떤 식으로든 종결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도달 불가능한 완성일지라도 연습이 필요하죠.“ 전시는 11월 4일까지 아뜰리에에르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