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찬란한 우리네 일생, 잊고 있던 건 아닌지

  • 아트조선 윤다함 기자

입력 : 2018.09.19 19:19

김성희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꿈과 욕망 향해 내달리는 線”

‘주머니에 손’… 작은 반항에서 시작된 투명인간의 자각

초대전 <Transparenter> 내달 12~21일 조선일보미술관

 
미색빛 하늘에 별이 흩뿌려진다. 별들은 서로 맞대어 의지하며 촘촘히 선(線)으로 엮인다. 별이 났다. 성좌 탄생의 순간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투명인간. 그는 지금 자신이 투명인간이란 사실을 알아채곤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사람 실물과 크기가 비슷한 대작으로, 보는 이가 투명인간과 대면해 동질감을 느끼고 이입하기 바라는 김성희의 의중이 담겨있다. <별 난 이야기 1808-투명인간> 181x86.5cm(100호) 한지에 먹과 채색 2018 / 아트조선
 
사람 형상을 따라 장지를 메운 수많은 하얀 반점이 알알이 정성스레 심은 듯 묘연히 빛나는 별 같다. 이들이 모여 별자리가 되고 그 자체가 곧 사람의 생김새를 이룬다. 성좌로 짜인 인간이라니 눈부시게 빛날 것 같지만 정작 반투명의 불분명한 형체, 그는 투명인간이다. 
 
인간의 욕심을 토대로 건설된 사회구조, 조직, 혹은 이념이나 가치에 순응하고 흡수되며 자신을 망각하고 실체마저 희미해져가는 ‘불투명인간’이 한국화가 김성희(55)가 그리는 투명인간이다. 최신 연작 <별 난 이야기-투명인간>은 별들의 형성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받침 삼아 우리네 삶을 통찰한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김성희 교수. 그의 뒤로 희미한 투명인간이 바라보고 있다. / 임영근 기자
 
“투명인간은 현대사회에 가속화되는 성과주의, 명예주의, 물질주의 따위에 몰입하며 본연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고 마침내 흡수돼 버리고 마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는 격렬하거나 급속히 진행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가랑비에 젖듯 천천히 흘러가요. 흐릿해지면서도 스스로는 더욱 뚜렷해졌다고 자만자족해버리는 현대인의 아이러니를 담았습니다.”
 
당장 현재를 살아내기 급급한 현대인은 자아를 잃어가는 실정도 모른 채 투명해져 간다. 종국에 이 불투명인간은 사회구조에 잠식돼 영영 투명해져 버리는 걸까? 김 교수는 “자신의 소실을 인지조차 못 했던 투명인간이 문득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덩달아 생각이 많아지다가 돌연 자기 형편을 깨닫는 과정이다”며 “현대인들이 더는 투명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뜻을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 행동에는 반항심이 담겨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기 때문. 지금껏 체계에 순응하며 의심 없이 달려온 투명인간이었지만 더는 아니다. 투명인간은 그렇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 발짝 물러서 반투명해져 가는 자아를 관망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 직접 추출한 ‘오리나무열매’ 염료로 자연의 色 구현
투명인간이란 오묘한 주제만큼이나 그림 역시 미묘한 분위기를 일면 풍긴다. 작품 표면에 배접한 한지 덕분이다. 그림의 맨 위에 얇은 한지를 겹쳐 희미하고 아득한 투명인간의 형상을 구현한다. 한국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동시대적이고 다채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기 위한 시도다. 그 때문에 김성희의 한국화는 고리타분하거나 뻔하지 않다. 김성희표 현대적인 감각과 세련됨은 전통재료와 천연재료로 완성된다.
 
그림의 바탕이 바로 서야 그림도 서는 법이다. 김 교수는 30년 이상 된 전통한지를 3~4합해 덧입혀 쓴다. 요즘에는 값싼 수입산 종이가 널렸지만,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천연과 가장 가까운 우리 전통한지와는 견줄 바가 못 된다. “이런 종이에서는 빛이 나요. 존중해줘야 하죠.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려내겠다는 계획을 종이와 의논하며 종이의 의견을 반영해요. 제 작업은 종이와의 대화에서 시작되는 걸요.”
 
<별 난 이야기 1804> 212x150.4cm(150호) 한지에 먹과 채색 2018 / 아트조선
 
노르스름한 황금빛을 띤 색은 학교와 자택 등지에서 채취한 오리나무열매를 끓여 직접 받아낸 천연염료로 들인 것이다. 김성희는 자연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염료를 직접 추출하는 게 쉽지 않지만 이러한 과정을 체험하며 재료의 물성과 자신이 합일되는 것을 느끼곤 한다고. 결국 사람도 자연 일부이기 때문이다. “교내 여기저기 오리나무가 많고 우리 집 뒷동산에도 있어 구하기 쉬워 쓰게 됐어요. 우리 몸은 땅에서 오고 땅으로 돌아가잖아요. 제게 이 누런 황금빛의 갈색은 땅의 색이에요. 가장 자연스러운 색이랄까요. 그리고 더는 변화하지 않을 제일 안정적이고 차분한 색이기도 하죠.”
 
─ 방향성, 오로지 선만 가질 수 있는 것
그가 한국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꼽는 것은 선과 그를 살리는 필법이다. 선은 한국화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이는 필법으로 완전해진다. ‘긋는다’는 행위는 시간성을 품고 있는데, 김 교수는 찰나의 들숨과 날숨, 상념, 의식 모두를 선에 숨김없이 담아낸다. “그래서 제게 선은 ‘현재형’이라는 겁니다. 선을 그으며 제가 살아있음을 자각해요. 지금 이 순간의 내 모든 존재를 선에 담아 투입합니다.”
 
선은 방향성을 가진다. 점도 면도 지닐 수 없는 방향성을 유일하게 지니는 기본 조형 요소로써, 김 교수에게는 나침반과도 같다. “선이 모든 걸 말해줍니다. 그저 선이 제 작품 그 자체일 따름이죠. 그리고 선은 붓에 의해 어떤 의지로 어느 쪽을 향해 나아갈지 결정됩니다. 선 하나에도 복잡하고 다양한 뜻이 담긴 셈이에요.” 방향성은 인간의 지향, 의지, 욕망을 상징한다. 이러한 방향성을 지닌 선의 시작점과 끝점, 교차점은 김성희에게 있어 하나의 특수한 상황으로 작동된다.
 
애묘인인 김성희는 5년째 고양이 ‘토토리’와 함께하고 있다. 토토리가 우연히 발에 염료를 묻힌 채 한지 위를 뛰어놀았던 때를 떠올리며 이를 다시 재현했다. 그렇게 토토리는 자신만의 방향성을 갖고 장지 위에 발자국으로 꽃을 심었다. 매화도를 인용해 묘(猫)화도라 이름 지었다. <별 난 이야기 1814-묘화도> 145x76cm(60호) 한지에 먹과 채색 2018 / 아트조선
 
김성희의 그림 속 수많은 선과 그들이 빚어낸 무수한 상황은 밤하늘의 별처럼 하나하나 독특하다. 이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이야기를 담은 초대전 <Transparenter>가 10월 12일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개막한다. 이번 전시에는 김 교수의 투명인간 신작 시리즈를 포함해 30여 점이 내걸릴 예정. 전시명 ‘별 난 이야기’는 특별난 이야기가 될 수도, 별이 태어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한다. 김 교수는 모든 생명체가 비범하고 별나다고 생각한다. 같은 별이 없듯 같은 인간도 없다. “설령 별나지 않은 누군가라도 그의 인생은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요. 별과 별자리가 빚어낸 투명인간과 대면하고 잊고 있던 자신과 마주해보세요.” 10월 21일까지. (02)724-7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