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9.03 13:51 | 수정 : 2018.10.02 13:15
현대에 이르러 미술은 더 이상 이성적 절대주의와 감성적 상대주의의 싸움이 아니다. 다만 예전 것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것들을 실험하는 회의주의적 장이다. 이에 반해 황용엽 작가는 이지러진 자기의 삶과 인간상에 자기만의 인간 명제를 달고 이를 끈질기게 추구해 이어나가는 ‘인간’을 그려내며 창작활동에만 매진한 예술가상의 전형을 보여준 고집 있는 화가다.
무엇보다도 1960년대 말 추상미술 경향이 화단의 주류로 자리 잡았던 한국화단에서 비극적인 현대사의 경험이 녹아 있는 형상회화를 제시한 황용엽의 예술세계는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고 작가의 인간상은 그가 살아온 삶과 한국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이라는 한정적인 영역을 넘어 역사적으로 살아있는 사실 이야기다. 굴곡진 역사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버텨온 한 인간의 운명 같은 삶의 흔적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을 넘으니 산, 다시 산을 넘으니 또다시 산인 것처럼 황용엽(又山 黃用燁) 화백은 인간이라는 산을 넘고 다시 넘어 88세(米壽)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을 꾸준히 연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다 지금에 와 서 있다. 여러 해를 걸쳐 끈질기게 갈구하며 추구해 온 그의 그림은 그래서 삶의 기록이다.
이번 조선일보미술관 기획초대전으로 삼십 년 세월의 이중섭미술상 여정을 기념하고자 1회 수상자 황용엽의 <같은 선상에서 展>을 열어 과거 작품들과 신작 30여 점을 선보인다.
1931년 평양에서 태어난 황용엽은 평양미술대학을 다니다 한국전쟁 발발 후 홍익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화단의 시류나 화단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오직 ‘인간’을 화두 삼아 인간의 심연을 그리며 독창적인 화풍을 구현해 온 화가로서 일관성과 능력을 가늠할 정도의 오랜 경력을 지니고 있다.
과거 작품을 정리해 보면 인간이란 소재를 갖고 그림을 그려왔고 작가는 불행하고 어두운 단면과 자유를 연상하며 화폭에 복잡하지 않은 선, 산뜻한 색, 간단한 형상을 등장시켜가며 인간을 억압하는 조형 작업을 절박하게 시도했다. 그에게 '인간' 명제는 1960년 작 <소녀와 소년>을 모태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에는 칙칙한 색감으로 그가 느꼈던 고통을 담았다면 떡살의 전통 문양을 장식으로 한 1975년 작 <인간>을 보면 70년대 작품의 “인간”은 기하학적인 선을 사용해가며 회색과 갈색 그리고 무채색으로 변화됐다.
70년대 초반에는 검은 청색과 검붉은 색으로, 중반부터는 회색과 갈색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모티브로 한 1982년 작 <인간>을 보면 80년대에는 다양한 전통문양과 민화적 요소에 색채가 밝아지고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를 담아냈다. 더불어 80년대 이후부터는 다양한 색감처리와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이미지가 연출되었다. 이어서 설화와 민화, 고분 벽화, 무속 신앙 등 민족 고유의 전통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인간 이야기’를 펼쳤다.
1995년 작들은 오방색과 문양이 더 다양해진 인간상으로 그려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샤머니즘 요소가 다시 등장하고 어린 시절 접했던 고분벽화 패턴들이 표현되고 70년대의 <인간> 시리즈를 재해석한 2016년 작 <삶 이야기> 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작가가 늘 '인간'이란 소재를 갖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한계상황에 부딪힌 인간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하며 6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 점점 도식화되었으며 간결하게 시대마다 달리 표현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는 좀 더 화면구성이 촘촘해졌다. 인간들의 얼굴 모습은 더욱 밝아졌고 실루엣은 더욱 섬세해지고 공간 구성은 더욱 복잡하고 움직임의 율동도 생겼다. 작품의 제목에서도 과거에는 인간이라는 명제에 집착했던 것이 <가족(Family)> <연인들(One Day Lovers)> <옛 이야기(Old Story)> 등처럼 제목도 인간애가 깃들어가며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물은 풍경, 자연, 나무, 산, 도시와 함께 같이하며 서로 만나 교류가 생겨나며 전체적으로 밝아지고 다채로워진다. 그 안에 선사시대 동굴벽화들도 도안도 생성한다.
최근 그의 신작들은 70년대의 색감과 유사한 회색과 블루의 단색조로 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과거 인간의 형태에서 토속적인 문양과 패턴이 새롭게 가미되어 밝아졌다. 작가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간결하지만 강한 에너지를 분명 느낄 것이다. 여전히 ‘인간’을 새롭게 변화하며 선들로 독립적인 화면들이 나타내며 다양한 구도와 분할된 화면에서는 각기 다른 스토리가 담겨 있는 듯하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의 일부분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결국 영혼이다. 그래서 본연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재창조하지 않고도 인간은 본연의 의미보다 더 많은 본질의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연구는 눈에 보이는 인간만이 아닌 내면에 나타나는 또 다른 자아가 될 수도 있으며 그 본연의 본질을 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용엽은 작가의 예술철학적인 정신세계를 통해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인간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황용엽의 인간은 독일의 표현주의처럼 인간 내면을 읽어내는 무거운 면도 있긴 하지만 한결같이 영감에 의하여 파악된 감정의 표출과 자아감정(自我感情)을 고양시키는 것을 기조로 하여 계속하여 인간의 참신하고 대담한 수법에 의한 예술적 변형에 특색을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가 가지는 인간이라는 회화성에는 인간의 기술과 진수가 보인다. 인간의 솔직한 표출행위, 섬세하면서 아기자기한 율동감과 흐름, 그러면서 자유스러우면서도 절제된 그의 인간 모습에서는 보는 이에게 무언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보이지 않은 선선함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황용엽 작가만이 화폭에 담아서 할 수 있는 특유의 선들은 쉽지 않은 인간 품격과 고급스러움이 자리한다. 그래서 그가 그려낸 인간은 살기가 전해지고 황용엽의 자부심이 되어 선율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작가 황용엽은 여러 가지 방법론으로 인해 깨닫게 되는 인간 본연의 가치와 갈등 구조를 인간성 추구로 잘 그려나가고 그만의 조형성으로 인간을 현대화하여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 답이 있다는 표현을 계속 증명해주길 바란다.
_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을 받아 게재되었습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