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8.29 17:36 | 수정 : 2018.08.29 17:37
붓질 하나로 먹이 색이 되고 색이 먹으로…
한국화가 김선두 첫 미술관 개인전 내달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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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이나 볼 컨트롤 같은 기본기를 갖추고 있다면 그다음은 공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축구를 뛰다 보면 공간이 열렸다 닫혔다 반복하는 게 보이거든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득점 찬스가 왔을 때 골을 넣어야 합니다. 공간 독해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건데 이게 그림에서도 똑같다는 거죠.”
열리고 닫히는 공간을 읽을 줄 알아야 축구 선수가 될 수 있듯이, 공간을 해석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그림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화에서의 공간 읽기는 여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흔히들 여백을 그저 텅 빈 곳으로 인지하곤 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김선두는 강조한다. “여백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 절대공백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빈 공간을 무조건 무언가로 꽉꽉 채우는 게 능사가 아니란다. 작가의 의도가 담긴 선과 점의 길이, 굵기, 농담, 속도, 진행 방향 등이 여백의 크기 등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 “여백은 여백대로 두고 나머지 공간을 밀도 있게 구성하거나 생동감 있는 필력을 구사해 채워야 합니다. 여백이라고 다 같지 않더라는 거죠. 어떤 공간은 비어있고 어떤 공간은 차 있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면 여백과 공백을 분별하는 법이 있을까? 이를 따로 측정하는 도구도 방법도 없지만 작가라면 ‘그냥’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선두는 스승 이종상 화백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여백과 공백을 구분 짓기란 겉모양이 똑같은 계란의 암수를 가려내기만큼이나 어려우면서도 또한 암놈과 수놈의 차이만큼이나 분명하게 다른 것’이라고요. 이렇듯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는 거죠. 많은 선을 치고 그 공간 값을 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작가마다 여백을 만드는 조건이 다르므로 스스로 터득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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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는 두껍고 견고하다. 튼튼한 장지 위에 여러 겹의 색을 올리고 또 올려 발색한다. 김 작가는 보통 서른 번에서 쉰 번은 족히 덧칠하고 쌓아 올린다. 밑에 칠한 색들이 위에 칠한 색을 통해 우러나오는 색감의 깊이가 바로 장지기법의 매력이다.
김 작가는 장지기법이 흡사 우리의 김치나 장(醬) 문화와 일맥상통한다고 짚었다. 김치를 담글 때, 배춧속에 양념을 겹겹이 묻혀 쌓고 쌓는 이른바 ‘겹의 미학’이 장지기법과 동일하다는 것. 또한 오랜 숙성기간을 거친 우리 고유의 은근한 장맛과도 같다. “색을 중첩하면서 아래 깔린 색이 우러나오는 건데, 저는 이걸 ‘색을 담근다’라고 말해요. 우리의 고추장이 무지막지하게 맵기보단 매운맛이 그윽하게 감싸지 않습니까? 그처럼 장지기법에선 아무리 강한 원색이라도 툭 튀어나오지 않고 부드럽게 배어나죠.”
견고한 장지에 색을 먼저 깊이 스미게 한 다음 얹히는 색을 그 위에 구사한다. 빙산의 일각처럼 장지 맨 위에 드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색보다도 진짜배기는 안에 스미고 쌓여 드러나지 않는 색인 셈이다. 아크릴은 색과 색의 층이 단절되지만 장지에서의 색은 서로 소통하고 수렴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심지어 잘못 그려 수정이 필요하다면 가제천으로 닦아내기만 하면 된다. “장지기법은 관용과 통섭의 미학입니다. 거친 붓질도, 가제천으로 닦아내도 모두 포용하고 견디는 걸 보면 은근과 끈기, 배려와 참을성이 합일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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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는 까만 먹에서 색을 느끼게 하거나 반대로 먹은 사라지고 색으로 그린 수묵화를 선보인다. 그는 한국화 화론의 묵유오채(墨有五彩)를 설명하며 “먹에는 다섯 가지 색이 들어있는데 까만 먹에 들어있는 색을 꺼내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작업 뿌리에는 골법용필(骨法用筆)의 필법이 있다. 수묵화는 물론이고 채색화도 이를 바탕으로 이어왔다. 필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묵화에서 색을 내보이기 어려운데 김 작가는 노련한 필법으로 역동적인 수묵화를 그려낸다. 모든 열쇠는 필법에 있다. "필법으로 묵법이 살기도 죽기도, 먹이 색이 되기도 색이 먹이 되기도 합니다. 장호(長毫)로 그리면 채색화지만 먹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고 동양화 붓으로 동양화 필법을 살리면 채색으로 그려도 수묵으로 느껴질 때도 있어요.“
이러한 연유로 김선두는 수묵화를 현대회화의 블루오션으로 제시한다. 서양에도 동양에도 없는 제3의 지점으로. 전시는 9월 18일까지.
이러한 연유로 김선두는 수묵화를 현대회화의 블루오션으로 제시한다. 서양에도 동양에도 없는 제3의 지점으로. 전시는 9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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