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도 투자한 만큼 효과...외국인 지휘자 전성시대

  • 뉴시스

입력 : 2018.03.28 09:31

마시모 자네티
국내 교향악단에 '외국인 지휘자' 전성시대가 찾아왔다.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경기필)는 26일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마시모 자네티를 상임지휘자로 선임했다. 경기필 창단 21년 만에 첫 외국인 상임지휘자다. 앞서 울산시립교향악단(울산시향)도 최근 러시아 지휘자 니콜라이 알렉세예프를 예술감독에 임명됐다. 1990년 창립 이후 첫 외국인 예술감독이다.

이뿐만 아니다. KBS교향악단은 요엘 레비 음악감독이 2014년부터 이끌고 있다. 대전시향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는 영국 출신 제임스 저드, 대구시향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역시 불가리아 출신 줄리안 코바체프다.

상임지휘자 없이 두 외국인 수석 객원 지휘자 티에리 피셔·마르쿠스 슈텐츠가 이끌고 있는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도 올해 안에 외국인 지휘자를 음악감독으로 선임할 가능성이 크다. ◇지휘자의 존재가치, 인식 달라져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지휘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하지만 2006년 정명훈 전 예술감독이 부임한 이후 서울시향의 기량이 눈에 띄게 늘면서 점차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는 "예전에는 지역 주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 정도로 오케스트라를 생각했는데 서울시향을 통해 오케스트라 기능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며 "글로벌 오케스트라로서 다른 나라와 민간 교류도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외국인 지휘자 선임 흐름을 짚었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도 "정명훈 지휘자가 서울시향 예술감독으로 임명될 당시만 하더라도, 지휘자의 중요성에 대해 반신반의했다"면서 "경험들이 쌓여 지금은 지휘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됐다"고 짚었다.

또한 수준이 높아진 관객들 사이에서 '지휘자를 보는 눈'도 생겨났다. 해외에서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는 이들이 늘어난 동시에 유튜브 등의 영상을 통해 유명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접하는 청중 역시 늘었기 때문이다.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는 "정명훈 감독 부임 이후 해외에 이름 있는 지휘자들이 내한이 잦아지고, 여러 교향악단 관계자들이 그 효과를 체험하면서 시스템에 변화가 생겼다"고 봤다.

외국인 지휘자 선임은 정체됐던 국내 오케스트라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효과도 있다. 도제식 교육이 이뤄지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교류와 발전 없이 한 자리에 머무는 경향이 똬리를 틀었는데, 학연·지연 없는 외국인 지휘자로 인해 이런 분위기가 타파된다는 것이다. 노 칼럼니스트는 "외국인 지휘자가 정체된 위기 구조를 깨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투자한 만큼, 효과 있다.

2016년과 지난해 국내 클래식계에서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리카르도 무티 음악감독이 단연 화제였다. 라 스칼라 음악 감독 출신인 세계적인 거장인 그가 경기필을 지휘한데다 '리카르도 무티 아카데미'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당 1억5000만원가량의 지휘료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특급 지휘자 1회 지휘료가 5000만원 수준으로 알려졌는데 너무 과도하다는 지적이 일어난 것이다. 경기필은 경기도에서 지원하는 단체라, 공공성의 역할도 대두됐다.

출연료가 과도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수긍한다면서도 전문가들은 무티의 경기필 지휘가 국내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다고 봤다. 특히 유명 지휘자들이 유럽 내에서 움직일 때는 관행적인 지휘료를 책정할 수 있지만,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데다가 세계 클래식계에서 아직 인지도가 약한 한국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데 프리미엄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명훈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 카드가 유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 클래식음악계에 대해 공헌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어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닉 등 명문 악단을 이끈 세계적인 명성의 그를 서울시향이 데리고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 칼럼리스트는 "유명 지휘자들은 한국에서 커리어를 쌓아도 자신의 경력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그들을 한국에 데리고 올 때 추가로 금전적이 보상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 지휘자의 선임은 오케스트라의 해외 네트워크를 넓히는데도 기여한다. 예컨대, 최근 경기필의 맑은 현 소리를 발굴해 호평 받은 뉴욕 필하모닉(뉴욕필) 야프 판 즈베던 음악감독을 비롯 네덜란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의 수석지휘자인 다니엘레 가티 등을 올해 객원 지휘자 라인업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건 무티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노 칼럼니스트는 "외국 지휘자들이 한국 오케스트라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으면, 다른 나라에서 코멘트를 할 수 있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네임 밸류도 얻게 된다"면서 "해외에서 연주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류 평론가 역시 "국내 오케스트라가 외국 지휘자를 초청해도 올 의사가 있는 지휘자들이 오는 것"이라면서 "경기필은 무티라는 마에스트로가 여러 번 지휘한 오케스트라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유명 지휘자가 올 수 있었다. 그게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본인이 지휘를 해도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자네티 경기필 상임지휘자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경기필은 20년 밖에 안됐지만 가능성과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경기필의 프로그램, 레퍼토리를 살펴봤는데 지휘자로서 굉장히 흥미가 생겼다"고 말했다.

다만 외국인 지휘자 선임으로 인한 부정적인 측면도 감안해야 한다. 경기필의 경우 '무티 효과'로 단원들과 지역 청중의 수준과 음악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상황이다.

그런데, 지휘자가 국내 음악계의 생태계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임명되는 오케스트라가 있다면 마찰이 생길 여지가 크다. 이런 위험성은 해당 오케스트라와 지방 자치 단체가 외국인 지휘자를 '구색 맞추기'로 활용할 때 높아진다.

황 칼럼니스트는 "지역과 관객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요구와 오케스트라의 전반적인 수준 향상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외국인 지휘자 선임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분위기 전환 등을 이유로 고려 없이 외국인 지휘자를 선임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청중의 이해를 먼저 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지휘자를 선임하든 먼저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고 클래식음악계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게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면서 "그 기반 위에 좋은 음악을 더할 때 오케스트라와 클래식음악 문화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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