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을 유희 공간으로… TV 보듯 작품 보며 웃길 바라요

  • 변희원 기자

입력 : 2018.03.02 01:26

세계 화단의 '악동' 작가 빔 델보예, 서로 관계없는 이질적 소재 결합
"노동의 가치 예술로 표현하고 싶어" 내달 8일까지 한국서 첫 개인전

빔 델보예(53)는 20대 후반, 자신의 첫 전시에 다녀온 뒤 고민에 빠졌다. 갤러리를 지키던 경비원이 웃음을 띠며 다가와 "20년 동안 갤러리 경비를 섰지만 전시 작품이 마음에 든 건 처음"이라며 악수를 청했기 때문이다. 델보예는 뿌듯함보다 두려움을 느꼈다. "미술 문외한이 내 작품을 좋아하다니, 난 이제 망했다.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이어야 큐레이터랑 평론가, 컬렉터들이 좋아한다던데, 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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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델보예가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 전시된 ‘마세라티 450S’ 안에 들어가 있다. 자동차 차체에 ‘이스파한’의 장인들이 전통 문양을 새긴 것이다. 그는 “빠르기로 유명한 이 자동차는 현대 기술의 산물이다. 여기에 6개월이 걸려야 완성하는 전통 문양을 입혀 초현실적인 조합을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했다. /김동환 기자

델보예는 '벨기에의 악동'으로 불린다. 파리 퐁피두 센터,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루브르 박물관, 테헤란 현대미술관, 팅겔리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 때마다 세계 미술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뉴욕타임스(NYT)는 그를 가리켜 '도발을 일삼는 앙팡 테리블(악동)'이라고 했다. '클로아카(Cloaca·2000)', 일명 '똥 기계'가 대표적인 예. 인간의 소화기관을 모방한 기계 안에 음식을 집어넣으면 배설물이 나오는 작품이다. 햄버거를 넣으나 정찬 요리를 넣으나 나오는 건 같은 배설물이고, 이를 진공 포장해 1000달러(약 108만원)짜리 '작품'으로 팔았다. 그는 "똥이야말로 계급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동등한 것"이라고 했다.


델보예는 장난과 조롱, 그리고 선동을 다 하고 싶어 하는 예술가다. 한국의 첫 개인전이 열리는 서울 삼청동 갤러리 현대에서 만난 그는 "미술계에서 사랑받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두려움을 떨쳐내는 순간, 내 작품은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레미콘 모형을 고딕 양식 건축으로 표현한 작품 ‘콘크리트 믹서’.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레미콘 모형을 고딕 양식 건축으로 표현한 작품 ‘콘크리트 믹서’. /갤러리 현대

미술계에서 그는 '사이의 대가(master of inbetween)'로 불리기도 한다.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소재를 합쳐서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번 작품들이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전시장 1층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마세라티'는 자동차 알루미늄 차체에 이란 전통 공예 도시 '이스파한'의 장인들이 전통 문양을 새긴 것이다. 독일 여행 가방 '리모와'나 스포츠카 '페라리', 삽에도 이런 문양을 새겨놨다. 2층은 1층보다 더한 이종(異種) 소재의 결합이다. 트럭, 콘크리트 믹서(레미콘)의 모형을 '레이저 컷' 기술로 잘라 고딕 양식의 섬세한 조각으로 재탄생시켰다.


삽, 여행 가방, 트럭 같은 일상의 물건이 델보예를 거치며 본래의 기능을 잃는 대신 극한의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 고급문화와 저급 문화, 일상과 초현실이 뒤섞이면서 사물이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와 질서가 흐트러진다. 그는 "고학력자나 미술 애호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공감하길 바란다. 햄이나 삽, 트럭을 보고서 무엇인지 이해 못 할 노동자는 없다. 이런 것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노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이제 델보예는 갤러리의 경비원에게 먼저 다가가서 자신의 작품이 어땠냐고 물어본다.

두려운 게 없다는 이 악동에게도 무서운 게 하나 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작품'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면서 언제나 충격을 느끼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웃으면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미술관, 갤러리용(用) 얼굴'이란 게 있어요. (손을 턱에 갖다 대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림을 분석하는 듯 진지하게 바라보며 뭔가 심오한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이죠. 영화관 가서는 다들 웃으면서 왜 미술관에선 그러지 않는 거죠? 갤러리와 미술관도 장난과 오락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전 TV나 영화와 경쟁하고 싶다고요!" 4월 8일까지. (02) 2287-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