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배우들의 고른 호연… 대담한 연출 돋보인 큰 무대

  • 이태훈 기자

입력 : 2018.02.27 00:45

리차드 3세

15세기 영국, 왕위 쟁탈전 끝에 요크가(家) 맏아들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후일 리차드 3세가 되는 막냇동생 글로스터 공작은 교활한 혀로 왕위 찬탈 음모를 꾸민다.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리차드 3세'(연출 서재형)는 700석 넘는 큰 극장에서 만나는 셰익스피어 정극이다. 흥행 배우 황정민이 10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와 주인공 리차드 3세를 맡았다. 길고 난해한 희곡은 '영웅'을 쓴 한아름 작가의 손을 거쳐 1시간 40분 분량으로 압축됐다. 지난주까지 평균 객석 점유율 96%.

형의 부인 엘리자베스 왕비(김여진·왼쪽)에게 딸을 아내로 달라고 강요하는 리차드 3세(황정민).
형의 부인 엘리자베스 왕비(김여진·왼쪽)에게 딸을 아내로 달라고 강요하는 리차드 3세(황정민). /샘컴퍼니
굽은 등으로 비열한 말을 뱉는 황정민은 무대 위에서 잉글랜드 사상 최악의 악인 리차드 3세 그 자체다. 그의 오른손 기형은 너무 자연스러워 모형처럼 보이는데, 커튼콜 때 황정민은 굽은 등과 손을 천천히 펴 보여준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특히 여배우들 연기가 좋다. 국립창극단 단원 정은혜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마거릿 왕비가 돼 저주의 곡성을 퍼붓고, 레미제라블의 에포닌이었던 뮤지컬 배우 박지연은 비운의 여인 앤으로 슬프고 고운 노래를 들려준다.

절정부의 시각 효과는 큰 무대에서 이 연극을 봐야 할 이유다. 살해당한 사람들이 무대 가득한 영사막에 유령처럼 나타나고, 가로 14m 세로 10m 넓이의 무대 중앙부가 죽어가는 리차드 3세를 실은 채 3m 아래로 꺼져 내린다. 비극적 운명을 관객 눈앞에 펼치는 대담한 연출이다.

대사는 날카롭고 우아하다. "우리는 장기판의 말일 뿐이니 놓이는 대로 사는 것뿐"이고, "인간은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살지만 그 희망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깃털처럼 가벼운 언어가 지배하는 요즘, 이 무대의 배우들은 불변의 진실을 정직한 언어의 칼로 바꿔 관객을 찌른다. 정수리를 때리듯 상쾌한 고통이다.

유명 배우들의 친숙한 이미지 탓에 웃지 않아야 할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는 건 옥에 티. 하긴 무거운 정극을 여유 있게 즐기도록 돕는 양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공연은 다음 달 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