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군기, 대표 전횡, 무조건의 복종

  • 최보윤 기자

입력 : 2018.02.23 01:44

[연극판서 쏟아지는 성추문, 문화가 어떻길래]
'예술가 괴벽' 용인한 탓도 커… 이윤택 극단 특히 집단성 강해

"거칠고 성적인 언어와 짓궂은 행위가 난무했지만 권력자 앞에서 눈치 볼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버티는 게 이긴다는 연극판에서 살아남으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가족처럼 가까워진 이 집단을 깨뜨리기가 두려웠다"….

연극인들이 모이는 페이스북 '대학로X포럼'에 오른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백이다. 집단주의가 강하고 도제식 훈련이 이뤄지는 극단 시스템 아래서 피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참아왔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연희단거리패는 밀양에 연극촌이 따로 있고 합숙 연습을 할 정도로 결속력이 강한 극단이다.

연희단거리패 출신 한 배우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군사독재 시절 같은 군기 문화가 강했고, 실제로 군대처럼 움직여야 했다"며 "모멸감에 포기하려다가도 '우리가 최고다' 식 세뇌를 당하다 보면 판단력을 잃고 따르게 된다"고 말했다.

상당수의 연극 극단 대표는 캐스팅부터 금전 운영 등 전권을 갖고 있어 자칫 전횡을 저지르기 쉽다. 연극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면 보통 석 달간 하루 10시간 가까이 호흡을 맞춘다. 이때 연출가의 절대적 권력 앞에서 모든 단원은 복종을 최우선 덕목으로 삼는다. 한 피해자는 페이스북에 "성적인 접촉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내 차례가 점점 다가온다' '또 나야' '또 무슨 일이 생길까'였다"고 고백했다.

'예술가란 그런 사람'이라며 괴벽을 용인해주는 풍토도 사태를 키웠다. 게다가 연극계는 유독 음담패설이 센 편이어서 성희롱과 성추행이 쏟아져도 무뎌지기 쉽다고 연극인들은 말한다. 한 연출가는 "연희단거리패의 집단성이 특히 강하고 획일화 경향도 뚜렷했다"며 "연극계에 소문이 파다했는데도 '선생님은 그래도 된다'는 인식에 마취돼 있던 것이 결국 곪아 터진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의 피해자는 "수위를 넘는 성적 농담과 스킨십을 '쿨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피해자인 동시에 방관자가 되곤 했다"면서 "좁은 연극계 바닥에서 권력에 항의하다 더 큰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한 극단 대표는 "무대 위에선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현실에서는 짐승의 야만성을 드러내도 잘못을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면서 "성희롱 교육은커녕 성희롱 개념조차 없는 곳이 연극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