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30 00:42
[공연 리뷰] 앙리할아버지와 나
무대는 프랑스 파리 낡은 아파트. 성질 괴팍한 앙리 할아버지 집 곁방에 스물한 살 여대생 콘스탄스가 들어온다. 아버지 앙리의 건강을 염려한 아들 폴이 가끔 아버지를 돌봐줄 사람을 찾아 싸게 세 놓은 건데, 할아버지 꿍꿍이는 따로 있다.

매 장면 맘 놓고 배꼽 잡게 하는 건강한 웃음은 이 연극의 독보적 힘이다. 관록의 배우 이순재·신구가 앙리를, 샛별 박소담·김슬기가 여대생 콘스탄스를 맡았다. 연기 손발이 척척 맞는다. 피아노를 포기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콘스탄스에게 앙리가 "나보다 더 늙었어?" 하며 퉁명스레 되받는 식이다. 아들 폴이 축구와 헤세의 소설 크눌프를 매개로 콘스탄스에게 빠져드는 장면에선 웃음이 폭발한다. 무대 위 배우의 호흡이 객석 웃음으로 번지는 게 찌릿찌릿 느껴진다. 배우 실물과 실연(實演)을 볼 수 있는 무대에서만 가능한 쾌감이다.
이 연극이 관객과 공명하는 힘은, 무엇보다 등장인물 각자가 불완전한 우리 모습의 일부를 담고 있는 데서 나온다. 앙리는 아들과 며느리를 떼놓으려 하는 고약한 노인네지만, 우울한 콘스탄스를 북돋워주는 따뜻한 어른이기도 하다. 콘스탄스는 마냥 철없는 아가씨 같지만 못 이룬 꿈의 아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젊은이다. '아버지가 훨씬 밝아지셨다'며 고마워하는 폴에게 콘스탄스가 "나란 존재가 쓸모 있을 때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할 때 가슴이 저릿하다. 그 시절 젊음이 못내 가슴 아파서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던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며 변해가고, 저마다 마음의 키가 한 뼘씩 자란다. 그 모습에서 돌아보게 되는 것은 나 자신과 내 가족이다.
"벗고 다니지 말고, 술 퍼마시지 말고. 니 아버지 말은 절대로 듣지 마라. 짧은 인생에서 중요한 건 사랑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느냐, 그것뿐이었어." 앙리의 마지막 편지를 콘스탄스가 읽는 엔딩에서 눈물 참을 강심장은 드물 것이다.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서 2월 1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