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25 03:11
[오늘의 세상]
추사 김정희의 '석란도'·고려~조선전기 '연지미인도'…
1960년대 일본으로 반출됐던 고서화 걸작들 이번에 고국으로
日 박물관서 오랫동안 보관
소장자 "고향 돌려보내고 싶었다"
1960년대 일본으로 반출됐던 우리 고서화 걸작 109점이 돌아왔다. 이른바 '이영개 컬렉션'으로 불리는 이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기업인이자 고미술상이었던 이영개(李英介·1906~?)가 일제시대부터 광복 후까지 한·일 양국에서 수집한 미술품이다. 이영개는 1971년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고서화총람'의 저자이기도 하다.
국내로 반입된 작품 중에는 추사 김정희의 '석란도(石蘭圖)', 고려 또는 조선전기로 추정되는 '연지미인도(蓮池美人圖)', 신세림의 '기려도교도(騎驢渡橋圖)', 이징의 '수하쌍마도(樹下雙馬圖)'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일본 나라(奈良) 국립박물관에 오랫동안 보관돼 있다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8월 사업가이자 고미술수집가인 이재환 차이나웨이트레블 대표이사가 109점 전체를 구입해 국내로 들여왔다. 주요 작품을 육안으로 본 홍선표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추사의 난초, 한석봉의 글씨도 좋지만,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1600년 전후 조선 전기 서화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고 평했다.
◇일본 소장자 "조선 미술품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어"
이재환씨가 일본 지인으로부터 이영개 컬렉션을 살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난해 여름이다. 오사카에서 소장자를 만난 그는 "소장자가 물려받은 미술품을 이왕이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어했다"며 "소장품을 한번에 정리하고 싶어해 가치가 높은 것만 골라서 살 수는 없었다"고 했다. 구입 가격은 공개하지 않았다.
국내로 반입된 작품 중에는 추사 김정희의 '석란도(石蘭圖)', 고려 또는 조선전기로 추정되는 '연지미인도(蓮池美人圖)', 신세림의 '기려도교도(騎驢渡橋圖)', 이징의 '수하쌍마도(樹下雙馬圖)'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일본 나라(奈良) 국립박물관에 오랫동안 보관돼 있다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8월 사업가이자 고미술수집가인 이재환 차이나웨이트레블 대표이사가 109점 전체를 구입해 국내로 들여왔다. 주요 작품을 육안으로 본 홍선표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추사의 난초, 한석봉의 글씨도 좋지만,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1600년 전후 조선 전기 서화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고 평했다.
◇일본 소장자 "조선 미술품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어"
이재환씨가 일본 지인으로부터 이영개 컬렉션을 살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난해 여름이다. 오사카에서 소장자를 만난 그는 "소장자가 물려받은 미술품을 이왕이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어했다"며 "소장품을 한번에 정리하고 싶어해 가치가 높은 것만 골라서 살 수는 없었다"고 했다. 구입 가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비행기를 만들어 일본군에 납품했던 이영개는 미술상으로도 유명했다. 1960년대 초반 일본으로 이주할 때 조선에서 모은 미술품을 가져갔고, 일본에서도 계속 모았다. 이영개는 자신의 소장품 중 109점을 일본 한 제과회사에 팔았다. 하지만 제과회사 사장은 나라국립박물관에 이를 기탁한 뒤 공개 한 번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상속자인 두 딸은 나라국립박물관에 있던 소장품을 사설 미술품 보관 창고로 옮겼다가 이번에 이재환씨에게 팔았다. 이씨는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 있던 이영개 컬렉션 일부라도 국내로 돌아오게 해 보람을 느낀다"며 "미술사적으로 가치 있다고 판단된 작품들은 향후 전시도 하겠다"고 밝혔다.
◇"추사의 석란도는 걸작"…전문가들의 논의·연구 필요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을 지낸 홍선표 교수는 "추사 김정희의 석란도는 그의 묵란화(墨蘭畵·수묵을 사용하여 그린 난초 그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활달한 걸작"이라고 꼽았다. 가로 127.5㎝, 세로 64㎝ 크기의 작품이다.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그림 '기려도교도'는 16세기 조선시대 문인화가 신세림 작품. 영월 군수를 지낸 신세림은 그림 실력이 뛰어나 도화서(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관청) 별제가 됐지만, 지금까지 전해진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죽작도' 한 점 등 매우 적다.
연못가에서 어린아이 셋과 노니는 여인을 그린 '연지미인도'와 석봉 한호가 이태백의 시 '망여산폭포'를 행서체로 쓴 글씨는 이영개가 쓴 '조선고서화총람'에도 도판이 실렸던 작품이다. 홍 교수는 "지금까지 나온 한석봉 글씨가 대부분 작은 서첩(書帖) 형태인데 비해 이번 작품은 가로 6m90㎝, 세로 61.5㎝ 병풍형 대작이란 점에서 특별하다"고 했다. '연지미인도'는 이영개가 고려시대 작품이라고 기록을 남긴 것과 달리, "화풍으로 볼 때 조선 전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홍 교수는 주장했다. 109점에는 작가 미상의 조선 전기 서화와 19세기 말 서화, 민예화 등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영개 컬렉션의 귀환'은 학계와 미술계 초미의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이영개 컬렉션이 국내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면서 "작품이 공개되면 여러 사람이 보고 논의하면서 그 가치가 매겨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실장은 "이영개 컬렉션은 연구자들은 물론 고미술 애호가들의 경험치를 높여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영개, 일제때 군수사업… 한·일 양국서 古미술 수집]
이영개(李英介·1906~?)는 친일 기업인으로 비난받지만 고미술에 대한 높은 안목과 방대한 소장품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경상남도 출신인 이영개는 열세 살이던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8년 송도항공기주식회사 이사를, 1944년 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 대표를 지냈다. 두 회사 모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사용된 비행기를 만드는 군수업체였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1960년대 초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고서화 연구가'를 자처하며 1971년 신라에서 조선 말까지의 서화를 도판과 함께 기록한 책 '조선고서화총람'을 출간했다. 사망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한국에 돌아온 109점 외에 이영개가 다른 자녀에게 물려줬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장품 행방이나 규모에 대해서는 드러난 바 없다.
◇"추사의 석란도는 걸작"…전문가들의 논의·연구 필요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을 지낸 홍선표 교수는 "추사 김정희의 석란도는 그의 묵란화(墨蘭畵·수묵을 사용하여 그린 난초 그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활달한 걸작"이라고 꼽았다. 가로 127.5㎝, 세로 64㎝ 크기의 작품이다.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그림 '기려도교도'는 16세기 조선시대 문인화가 신세림 작품. 영월 군수를 지낸 신세림은 그림 실력이 뛰어나 도화서(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관청) 별제가 됐지만, 지금까지 전해진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죽작도' 한 점 등 매우 적다.
연못가에서 어린아이 셋과 노니는 여인을 그린 '연지미인도'와 석봉 한호가 이태백의 시 '망여산폭포'를 행서체로 쓴 글씨는 이영개가 쓴 '조선고서화총람'에도 도판이 실렸던 작품이다. 홍 교수는 "지금까지 나온 한석봉 글씨가 대부분 작은 서첩(書帖) 형태인데 비해 이번 작품은 가로 6m90㎝, 세로 61.5㎝ 병풍형 대작이란 점에서 특별하다"고 했다. '연지미인도'는 이영개가 고려시대 작품이라고 기록을 남긴 것과 달리, "화풍으로 볼 때 조선 전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홍 교수는 주장했다. 109점에는 작가 미상의 조선 전기 서화와 19세기 말 서화, 민예화 등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영개 컬렉션의 귀환'은 학계와 미술계 초미의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이영개 컬렉션이 국내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면서 "작품이 공개되면 여러 사람이 보고 논의하면서 그 가치가 매겨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실장은 "이영개 컬렉션은 연구자들은 물론 고미술 애호가들의 경험치를 높여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영개, 일제때 군수사업… 한·일 양국서 古미술 수집]
이영개(李英介·1906~?)는 친일 기업인으로 비난받지만 고미술에 대한 높은 안목과 방대한 소장품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경상남도 출신인 이영개는 열세 살이던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8년 송도항공기주식회사 이사를, 1944년 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 대표를 지냈다. 두 회사 모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사용된 비행기를 만드는 군수업체였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1960년대 초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고서화 연구가'를 자처하며 1971년 신라에서 조선 말까지의 서화를 도판과 함께 기록한 책 '조선고서화총람'을 출간했다. 사망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한국에 돌아온 109점 외에 이영개가 다른 자녀에게 물려줬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장품 행방이나 규모에 대해서는 드러난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