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윳빛 '달항아리'의 온기… 일상으로 스며들다

  • 변희원 기자

입력 : 2018.01.10 00:30

평창 올림픽 '달항아리 에디션'
간결美 아모레퍼시픽 신사옥·패션 명품 로에베 매장 전시 등 생활·건축·디자인서 각광

강원 평창과 서울 용산, 그리고 집집마다에 우윳빛 보름달이 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전시실에서 보던 달항아리가 생활과 건축, 디자인으로 스며들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 용산에 문을 연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하얀빛을 뿜어내는 네모반듯한 건물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맞아 출시된 '올림픽 헤리티지 컬렉션 2018 달항아리 에디션'은 높이 7㎝ 달항아리 24개에 동계올림픽 역사를 새긴 기념품이다. 스페인 패션 브랜드 로에베는 전 세계 매장 쇼윈도에 가방과 함께 달항아리를 놓았다.

간결함, 그리고 비워내기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중)

‘올림픽 헤리티지 컬렉션 2018 달항아리 에디션’은 제1회 프랑스 샤모니 동계올림픽부터 올해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각 대회 특징을 나타내는 일러스트를 높이 7㎝ 달항아리 24개에 넣었다.
‘올림픽 헤리티지 컬렉션 2018 달항아리 에디션’은 제1회 프랑스 샤모니 동계올림픽부터 올해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각 대회 특징을 나타내는 일러스트를 높이 7㎝ 달항아리 24개에 넣었다. 국보 제262호 백자대호(白瓷大壺)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달항아리에 한국인 디자이너 6명이 글과 그림을 새겼다. /왁티
'백자대호(白磁大壺)'라 불린 조선시대 도자기에 달항아리란 이름을 붙인 이는 미술사학자 최순우다. 화가 김환기도 이 도자기를 가리켜 '달'이라 칭했다. 보름달처럼 크고 원만한 모양새, 소박하고 은은한 빛과 어울리는 이름이라 널리 쓰인다.

달항아리가 현대에 들어 생활에 활용된 대표적 예는 일명 '뚱바'라고 불리는 빙그레의 바나나 우유 용기다. 빙그레는 1974년 이 제품을 출시하면서 한국인에게 친숙한 용기를 만들기 위해 달항아리를 차용했고 대성공을 거뒀다.

최근 달항아리의 인기는 '간결함'과 '비워내기'로 대변되는 미니멀리즘 유행과 맞물린다. 건축가 치퍼필드도 "화려한 기교 없이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달항아리의 느낌을 살렸다"면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을 군더더기 없이 디자인했다. 대림미술관의 '핀 율 탄생 100주년' 전시에서 목재와 직물을 강조한 북유럽 가구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놓였던 달항아리도 마찬가지. 인테리어 블로거 이주현(36)씨는 "지난 5년간 하얀 벽이나 장식 없는 원목, 대리석 가구가 인테리어에서 인기를 끌어왔다. 나무, 돌, 흰 벽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장식품을 찾다 보니 달항아리를 들여놓게 됐다"고 했다.

차가운 아파트에 온기를

김환기는 달항아리를 보고 이렇게 감탄했다. "싸늘한 사기로되 다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

(왼쪽)‘로에베’매장 쇼윈도에 가방과 함께 놓인 달항아리. (오른쪽)달항아리의 흰색과 간결한 모양새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왼쪽)‘로에베’매장 쇼윈도에 가방과 함께 놓인 달항아리. (오른쪽)달항아리의 흰색과 간결한 모양새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로에베 인스타그램·아모레퍼시픽
달항아리의 따뜻하고 온화한 모양새 때문에 공간에 온기를 불어넣을 때 달항아리를 찾는다. 이도 아뜰리에의 유세희 실장은 "달항아리의 곡선이 직선으로 닫힌 집의 답답함과 차가움을 누그러뜨리기 때문에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많이 구입한다"고 했다. 세계 곳곳 매장에 달항아리를 전시한 로에베 측은 "가방, 옷 같은 제품을 달항아리라는 백지 같은 공예품과 함께 쇼윈도에 내놓은 파격, 그 뜻밖의 어울림에 고객들 반응이 뜨거웠다"고 했다. 로에베 디자이너 JW앤더슨도 "영국 도예가 루시 리가 달항아리와 찍은 사진을 보자마자 마법처럼 끌렸다"며 "달항아리에서 순수함을 느꼈다"고 했다.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장남원 교수는 "국내외 수요가 많아 달항아리를 만드는 도예가는 100명도 넘는다"며 "하지만 제대로 된 학문적 연구가 이뤄지기도 전에 '한국의 미'로 자리 잡은 건 아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