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차이콥스키가 말을 걸어왔다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7.12.14 01:12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감미로운 호른·막힘없는 현 등 게르기예프 지휘 맞춰 드라마 연출

발레리 게르기예프(64)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이 열린 12일 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영하 12도의 추운 날씨였지만 공연장은 악단과 객석이 빚어낸 열기로 뜨거웠다.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으로 막 올린 1부의 주인공은 러시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42). 불곰을 닮은 당당한 체구로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190㎝를 넘는 큰 키와 두툼한 어깨와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고 야무진 손놀림으로 현란한 음상을 그려냈다.

12일 오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하는 발레리 게르기예프(가운데)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12일 오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하는 발레리 게르기예프(가운데)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빈체로
지휘대 없이 무대 바닥에 선 게르기예프는 열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음의 물결을 일으켰다. 평소 애용하는 10㎝ 크기의 '이쑤시개' 지휘봉은 사용하지 않았다. 서울에 오기 전, 일본 도쿄·오사카·구마모토를 돌며 연주했지만 소리에선 여독(旅毒)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2부에서 게르기예프는 보면대마저 치워버린 채 암보(暗譜)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에 돌입했다. 1악장. 먼저 클라리넷이 어둡고 무거운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불길한 기운을 내뿜었다. 현악 주자들은 깊고 묵직한 사운드로 극적인 장면을 떠받쳤다. 2악장에선 감미로운 호른의 독주가 펼쳐졌다. 차분하면서도 애조 띤 슬픔. 이내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가세하면서 곡은 순식간에 정점으로 치달았다.

왈츠로 잠시 숨을 고른 악단은 잘게 토막낸 스타카토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다 팀파니의 연타를 신호로 일제히 회오리를 일으켰다. 막힘 없이 흐르는 현의 몸짓과 쭉 뻗어오르는 황금빛 관의 외침이 맞물려 가슴 뛰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악보의 음표를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 천변만화하는 색감을 흩뿌리는 게르기예프의 차이콥스키는 명불허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