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부부의 '마지막 파드 되', 객석엔 눈물이 터졌다

  • 최보윤 기자

입력 : 2017.11.27 01:32

황혜민·엄재용 고별무대 '오네긴'

정상에서 스스로 내려온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더 많은 박수와 함성을 마다하고 함께 무대를 떠나는 유니버설발레단(UBC)의 스타 무용수 부부 황혜민(39)과 엄재용(38). 단호한 결정만큼이나 빈틈없었던 황·엄 부부의 '마지막 파드 되(pas de deux·2인무)'는 이 커플의 발레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24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드라마 발레 '오네긴'. 은퇴 무대에 선 둘의 이별 몸짓은 애절하게 객석에 스며들었다. 여기저기서 터진 눈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라는 '오네긴'의 주제에 공감했기 때문이겠지만, 더 이상 이들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없다는 데에 대한 아쉬움도 컸을 것이다. '뜨거운 안녕'이란 단어는 이날 장면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연기를 마친 뒤에는 이들의 앞날을 축복하듯 '브라보'와 뜨거운 함성이 이어졌다. 황혜민 수석 무용수는 이날 공연 뒤 "15년간의 무대가 필름처럼 지나간다. 마지막 무대는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며 화답했다.

유니버설 발레단 스타 커플 황혜민·엄재용 수석 무용수의 ‘거울의 파드 되’.
유니버설 발레단 스타 커플 황혜민·엄재용 수석 무용수의 ‘거울의 파드 되’. /유니버설 발레단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동명의 원작을 무대로 옮긴 드라마 발레 '오네긴'(안무 존 프랑코)은 바람둥이 기질의 자유분방한 도시 귀족 오네긴(엄재용)과 진실한 사랑을 갈망하는 순진한 시골 처녀 타티아나(황혜민)의 엇갈린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맞춰 극적인 감정 변화와 가슴 저린 연기, 창의적인 안무가 어우러져 많은 스타가 은퇴 작으로 선택해 왔다. 강수진(국립발레단장) 역시 이 작품으로 은퇴 무대에 올랐다.

한 마리 새처럼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가녀린 체구의 황혜민은 마치 타티아나가 되기 위해 지금껏 살아온 사람처럼 녹아들었다. 오직 오네긴만을 열망했던 타티아나의 수줍은 짝사랑은 1막 '거울의 파드 되'에서 불꽃처럼 타올랐다. 하늘로 솟구칠 듯한 리프트와 점프로 오네긴과 사랑을 나누는 타티아나의 열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겉으로는 행복 가득한 표정이지만 실제론 사랑을 외면하는 오네긴 탓에 타티아나의 열정은 더욱 처연하다.

황·엄 커플의 감정 표현은 3막의 '회환의 파드 되'에 이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친구의 아내가 된 타티아나에게 뒤늦게 구애하는 오네긴의 후회. 사랑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는 타티아나의 폐허 같은 마음.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처절함에 가슴 저리다.

부부는 서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엄재용은 아내에게 "부상 한번 없이 뚝심있게 자리를 지켜온 것만 봐도 저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며 "작은 몸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대단해 무대 위에선 정말 크고 강하다"고 했다. 황혜민은 "재용씨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상대를 이끌어 준다"고 화답했다.

이 커플의 집에는 물을 담아 얼린 종이컵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고 한다. 욱신거리는 온몸의 근육을 풀어주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를 위한 맞춤 마사지. 하지만 이제는 매일 수십 잔의 얼음 컵을 만드는 수고가 필요 없을 것이다. 부부에게는 잔인한 말이겠지만, 눈물과 땀이 고인 이들의 얼음 종이컵이 그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