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체류권 획득·이주 여성 보호… 파독 간호사가 있었다

  • 최보윤 기자

입력 : 2017.11.20 00:05

[병동소녀는…]

실화 바탕의 다큐멘터리 형식
'언니들'의 진취적이었던 삶 다뤄

소녀에겐 꿈이 있었다. 남동생 뒷바라지용으로 취급하는 집을 벗어나 원하는 공부도 하고, 미니스커트도 입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싶었다. 노동력이 아닌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이들. '외화벌이'의 동의어이자 '자기희생'의 숭고한 상징이 된 '파독(派獨) 간호사'가 아닌, 자기 의지로 가득 차 사회 변혁의 부싯돌이 되는 '재독(在獨) 세계 시민'이라 외치고 싶었다.

12월 3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리는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연출 김재엽)는 사건의 이면(裏面)을 바라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영상과 내레이션이 섞여 다큐멘터리처럼 흘러가는데도 무겁지 않게 관객의 웃음과 눈물을 조율한다. 권리 쟁취를 위해 띠두르고 거리로 나서는 '언니들'의 삶과 사랑을 대하는 태도가 어찌나 진취적인지 1960년대 판 '섹스앤드더시티' 같다.

연극의 주인공인 파독 간호사들이 독일 체류 허가증 쟁취를 위해 시위하는 장면.
연극의 주인공인 파독 간호사들이 독일 체류 허가증 쟁취를 위해 시위하는 장면. /예술의전당
연극은 극 중 김재엽(정원조)이라는 연출가가 독일에서 파독 간호사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실제로 2년 전 교환교수로 독일을 찾았던 김재엽 연출가는 재독여성한인모임의 주축이었던 유정숙 박사를 비롯해 40년 전 해외개발공사 파견 모집으로 취업한 여성 중 독일에 남은 이들을 취재해 작품을 만들었다.

명자(전국향), 순옥(이영숙), 국희(홍성경)는 1960년대 각자 사연을 안고 독일로 온 간호사들. 태어난 곳은 달라도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를 떠나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대학생 정민(김원정)은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근대화 과정 속에 유폐된 노동자의 삶을 조명하고자 유학을 택한다. 정민이 박사 논문을 위해 간호사들을 만나면서 4명의 '언니들' 목소리는 하나가 되고 연대해가며 사회적 힘을 얻는다.

'언니들'은 1976년 독일 정부가 체류 허가를 중단하자 자발적 서명 운동을 벌여 체류권을 획득하고, 1980년 광주민주항쟁 사건을 독일 TV로 접한 뒤 군사정권에 항의 시위를 벌인다. 이주노동자 세금은 걷어가면서 복지 혜택 없는 시스템을 고발하고, 고통받는 여성을 위한 '쉼터' 역할을 하며 여성 운동가로 성장한다. 집 떠난 이들이 자신을 지켜내고 투쟁하는 고군분투 정착기다. "고향이 뭐 별거니? 지금 사는 집(Zuhause)이 고향이지!"라면서도 자녀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우리 가락을 가르친다.

편견과 고정된 이미지에 가둬 개성을 죽이고 '부품화'시키는 이들에 대한 시원한 발길질이다. 과거에 박제된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언니들이 외친다. "우리가 못할 게 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