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한마디 없이… 절망·희망의 감정 드러낸 4시간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7.10.08 23:53

'인터스텔라' 작곡가 한스 치머, '라라랜드' 저스틴 허위츠 내한 공연

은막(銀幕)을 적시던 음악이 어두침침한 영화관 밖으로 외출했다. 1만여 관객이 모여든 지난 7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 영화 '라라랜드'와 '위플래쉬'의 작곡가 저스틴 허위츠(32)가 흰색 연미복 차림으로 지휘봉을 들고 성큼성큼 무대로 걸어 나왔다. "미국에서 '위플래쉬'는 독립 영화로 인식됐는데, 한국에서는 인기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라라랜드'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했던 7인조 재즈 밴드를 이끌고 내한했다. 허위츠와 7인조 재즈 밴드 전원이 무대에서 호흡을 맞춘 건 영화 개봉 이후 한국 공연이 처음이다. 이들은 한국의 70인조 디토 오케스트라와 함께 '라라랜드'의 수록곡을 들려줬다. 진행 방식이 특이했다. '라라랜드'의 음악이 흘렀던 영화 장면을 먼저 무대 전면 대형 스크린으로 2~3분 보여준 뒤, 재즈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노래는 남녀 주인공 라이언 고슬링과 에마 스톤의 영화 속 음성을 그대로 사용했다.

지난 7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열린 영화음악가 한스 치머의 내한 공연. 녹음 스튜디오에서 두문불출하던 치머는 무대에 올라서자 기타와 키보드를 번갈아 연주하며 19인조 밴드를 이끌었다. 아래 사진은 한스 치머의 메시지를 우리말로 낭독한 배우 이병헌씨.
지난 7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열린 영화음악가 한스 치머의 내한 공연. 녹음 스튜디오에서 두문불출하던 치머는 무대에 올라서자 기타와 키보드를 번갈아 연주하며 19인조 밴드를 이끌었다. 아래 사진은 한스 치머의 메시지를 우리말로 낭독한 배우 이병헌씨. /프라이빗커브
영화 장면이나 배우들 음성에 실연(實演)을 곁들이는 '필름 콘서트'는 영화와 공연의 새로운 이종(異種) 결합 방식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다. 디지털 복제 예술인 영화와 전통적 아날로그 장르인 공연을 한자리에서 즐기는 묘미랄까. 서울에 있는 악단과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영화 배경인 로스앤젤레스의 등장인물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이 천문대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며 춤추는 장면에서 공연장의 낭만적 운치도 절정에 올랐다.

2부는 '라이온 킹' '글래디에이터'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 등 30년간 음악 120여 편을 작곡해 아카데미상과 그래미상을 받은 영화음악가 한스 치머(60)의 무대였다. 영화음악가는 좀처럼 녹음 스튜디오에서 나올 일이 없지만 무대로 올라선 치머는 키보드와 기타를 번갈아 치면서 19인조 밴드가 포진한 무대 전후좌우를 누비고 다녔다.

주술 같은 도입부로 시작한 '글래디에이터'부터 전자첼로 협주곡으로 편곡한 '캐리비안의 해적'까지 관객들의 추억을 일깨우는 선율이 나올 때마다 환호성도 커졌다. 특히 붉은 노을을 연상시키는 반원(半圓) 영상을 배경으로 탁 트이고 광활한 초원을 연상시키는 '라이온 킹'의 전주가 흐를 때 객석에선 가장 큰 함성이 터졌다. 공연 후반부에는 영화배우 이병헌이 깜짝 출연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개봉 당시 콜로라도 극장에서 일어났던 총기 난사 사건을 접하고 느꼈던 한스 치머의 슬픈 메시지를 이병헌이 우리말로 낭독했다.

치머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과 함께 작업한 '다크 나이트'와 '인터스텔라'의 음악들도 연이어 들려줬다. 거칠고 과격하게 음을 일그러뜨리며 음향과 음악의 경계를 허문 '다크 나이트'에서 절망과 분노가 엿보였다면, 마지막 곡 '인터스텔라'에서는 절체절명 위기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영화의 따스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4시간 반 동안 이뤄진 이날 공연은 단 한마디 대사 없이 음악만으로도 절망과 희망 같은 감정을 온전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황금연휴의 하루와 맞바꿀 가치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