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차별, 그 깨우침의 역사

  • 이주헌 미술평론가

입력 : 2017.10.01 23:48

이주헌의 '테이트―누드展' 리뷰

이주헌 미술평론가
이주헌 미술평론가
'테이트 명작전―누드'는 서양 누드미술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다채로운 변화를 겪었는지 생생히 보여주는 전시다. 그 변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미술이 성차별에 저항하고 성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누드' 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벌거벗은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근세 이후 여성 누드가 남성 누드에 비해 훨씬 많이 제작됐으니 자연스러운 연상이다. 그러나 서양 누드미술의 시원인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은 정반대다. 남성 누드는 많이 제작됐지만, 여성 누드는 드물게 제작됐다. 왜 그랬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여성은 '남성이 되다 만 존재'였다. 더구나 벌거벗은 여성의 몸은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자연의 무질서'를 환기시키는 요소가 있었다. 철저한 통제가 필요했다. 이런 확고한 성차별 의식의 발로로 남성을 누드로, 여성을 옷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근세 이후 점차 여성 누드가 많이 표현된 것은 이런 의식의 해체를 의미하는 걸까?

피부색 차별을 주제로 그린 마를렌 뒤마의 '납 화이트(왼쪽)'와 '아이보리 블랙'. 1997년작.
피부색 차별을 주제로 그린 마를렌 뒤마의 '납 화이트(왼쪽)'와 '아이보리 블랙'. 1997년작. /테이트미술관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이는 여성 누드의 포즈에서 알 수 있다. 고대나 근대나 남성 누드는 항상 욕망과 행위의 주체로, 여성 누드는 그 객체로 표현됐다. 그래서 당당하고 능동적인 남성 누드와 달리 여성 누드는 소심하고 수동적인 느낌을 준다. 출품작 가운데 레이턴의 '프시케의 목욕'이나 에티의 '칸다울레스', 밀레이의 '의협 기사'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수동적 포즈는 여성이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존재, 곧 '지배를 당하는 자'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현대 누드는 마침내 이런 오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데로 나아갔다. 부르주아의 판화 '자연의 법칙' 시리즈를 보면 여성은 몸집이 크고 남성은 작다. 게다가 이 여성은 남성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우리가 알고 있던 '자연의 법칙'이 깨진 셈이다. 슬레이의 '비스듬히 누운 폴 로사노'는 여성 화가가 그린 남성 누드다. 남성 모델은 마치 옛 그림의 여성 모델들이 취했던 것과 같은 수동적 포즈를 취하고, 화가는 여성이지만 당당히 시선의 주체가 된다. 전통적 누드미술이 보여준 성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현대사회는 더 이상 성과 인종, 신념 등의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매우 인상 깊게 다가오는 그림이 뒤마의 '납 화이트'와 '아이보리 블랙'이다.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을 그린 이 연작은 피부색을 의미하는 제목에서부터 보는 이를 멈칫하게 한다. 납 화이트는 잿빛이 섞인 흰색이다. 아이보리 블랙은 상앗빛이 섞인 검정이다. 둘 다 완전한 흑과 백이 아닐뿐더러 서로를 수렴한다. 그러나 화가의 조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한동안 피부 빛깔만으로 흑과 백을 나눠 분리 정책을 펼쳤다.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은 분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조화를 위해 존재한다. 이번 전시가 드러내듯, 서양 누드미술의 역사는 그 각성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전시는 12월 25일까지 소마미술관. (02)801-7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