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호 "드라마 '도깨비'같은 '춘향' 보여드릴게요"

  • 뉴시스

입력 : 2017.09.05 09:50

국립무용단 '춘상'
졸업 파티에서 울릴 만한 스윙이 가미된 멜로디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내 국립무용단 연습실에서 울려 퍼졌다.

남녀 짝을 지어 둥그렇게 선 국립무용단 단원들의 움직임에는, 한국무용수들답게 한국적인 것이 묻어났지만 평소 봐왔던 것보다 몸놀림이 경쾌하고 모던했다.

가만히 음률에 귀를 기울이니 국악을 변주한 것이 아니다. 싱어송라이터 선우정아와 재즈 피아니스트 염신혜가 결성한 재즈 프로젝트 '리아노 품(Riano Poom)'이 2014년 발매한 동명 앨범 수록곡 '저스트 비포'.

남녀 주인공인 '춘'과 '몽'이 둘이서만 파티장을 나와 서로에게 빠져드는, 발레의 파드되(2인무)를 보는 듯한 장면에서는 인디 듀오 '볼빨간 사춘기'의 '우주를 줄게'가 우아하게 편곡돼 흘렀다. 50여 년간 한국 창작무용을 개척해온 '한국무용계의 대모' 안무가인 배정혜(73) 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우리 전통춤에 모더니즘을 부여해 '한국무용 매진 신화'를 새로 쓴 연출가 정구호(52)와 한국 대중음악이 만나 모던한 우리 무용의 탄생을 예고했다.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전속단체 국립무용단(예술감독 김상덕)은 오는 21일~24일 해오름극장에서 '2017-2018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개막작 '춘상(春想)'을 선보인다.

정구호는 개막에 앞서 4일 오후 국립극장 내 국립무용단 연습실에서 열린 '춘상' 간담회에서 "춘향전의 2017년 버전은 무엇일까 고민했는데 TV 드라마도 '도깨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있듯 무용에도 현대적인 감각과 이야기를 근본으로 하는 작품이 있었으면 했다"고 말했다.

이번 '춘상'에 안무가로 참여한 배정혜가 2001년 안무한 작품이자 2011년 국립무용단의 51년 역사상 처음으로 티켓이 완판됐던 '춤, 춘향'을 보고 감동 받았던 정구호는 춘향을 "우리 시대의 기록으로 만들면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공연 제목 '춘상'은 '봄에 일어나는 다양한 상념'이라는 의미다. 스무 살 청춘들이 겪을 법한 사랑의 감정들이 1막 8장 구성으로 펼쳐진다.

고전소설 '춘향전' 속 춘향과 몽룡은 오늘날로 시공간을 이동,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는 청춘 남녀 '춘'과 '몽'으로 재탄생된다.

두 남녀 무용수가 짜릿한 첫 만남부터 사랑의 기쁨, 부모의 반대로 인한 갈등과 이별, 이후 극적인 재회를 거쳐 언약에 이르기까지 총 여덟 개의 과정으로 구성된 장면을 통해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춤으로 표현한다.

최근 국립오페라 야외 오페라 '동백꽃 아가씨'를 통해 오페라 연출가로서도 성공적으로 데뷔한 정구호는 이미 국립무용단과 함께 작업한 '단' '향연' '묵향'을 통해 한국무용 공연을 잇따라 매진시키며 공연계 실력 있는 아트 디렉터로 자리매김했다.

극이 있는 무용극은 이번이 처음이다. 직접 이야기도 다시 썼는데 원작의 두 남녀 주인공을 반대하는 변사또 대신에 현대 분위기에 맞춰 둘 사이의 장애물을 부모의 반대로 설정했다.

무대 전환이 역동적인 점과 정구호 기존 작품에 주로 무대·의상 색깔로 사용한 오방색 대신 색이 빠져 있는 부분도 현대적인 색깔을 더한다.

무엇보다 모던함을 배가시키는 건 배경음악으로 한국 대중가요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저스트 비포'와 '우주를 줄게' 외에 R&B 싱어송라이터 정기고의 '헤이 배(Hey Bae)', 국민 여동생이기에 앞서 걸출한 싱어송라이터인 아이유의 '이 지금', 마니아층을 보유한 모던 록밴드 '넬'의 '스테이' 등의 음악이 사용된다.

드라마 '겨울연가', 영화 '올드보이' '건축학개론' 등을 작업한 음악감독 겸 작곡가 이지수가 원곡을 6~10분 길이의 8곡으로 편곡, 작품에 신선한 감성을 더했다. 국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절절한 감정이 배어 나왔고 매끈함이 더해졌다. 정구호는 "싸이 같은 K팝의 대표곡이 아닌, 음악적 감각이 있는 싱어송라이터의 곡들을 골라 음악에 현재의 생각과 생활이 묻어나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국립극장의 안호상 극장장은 평소 국립극장에 대해 전통 공연이 아닌 지금이 반영된 컨템포러리 공연을 선보이는 극장으로 정의한다. 정구호는 이 흐름에 최적화된 연출가 중 한명이다.

그는 "한 나라의 문화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전통을 고수하고 연구하는 그룹, 전통을 현대화시켜 새롭게 만드는 그룹, 실험적인 걸 선보이는 그룹 등 셋이 모두 잘 발달돼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비틀스는 현대의 새로운 클래식이라고 하잖아요. 시대와 변화가 반영된 것이 계속 살아남으면 뉴 클래식이 됩니다. 저 역시 요즘 시대의 기록을 하고자 하는 기본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었어요."

정구호는 기본 춤의 근간은 한국무용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무용 거장들 중에서 가장 모던하다는 평가를 받는 배정혜의 안무는 근육의 사용, 발 디딤새, 무릎의 굽힘, 어깨선의 흐름 등에서 한국무용 고유의 멋이 현대적인 춤사위로 녹아 있다.

18세기 프랑스 귀족문화가 배경인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동시대인 조선 영·정조시대의 양반문화, 즉 귀족·기방 문화로 옮겨 호평 받은 정구호는 "'라 트라비아타' 같은 오래된 클래식은 수도 없이 변주된다"고 했다.

"변주할 때마다 다르게 해석이 되죠. 빨간색 미니 원피스를 입은 '라 트라비아'도 있죠. 한국에서는 클래식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많지 않아요.

정구호는 이번에 이런 형태의 이야기, 무대, 의상, 음악 그리고 춤까지 아울러 '네오클래식'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춘향이라는 작품의 오리지널티가 좋아요. 그래서 개작하기보다는 지금 2017년 시대에 맞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2006년 '솔(Soul), 해바라기' 이후 11년 만에 국립무용단과 함께하는 신작을 내놓는 배정혜는 한국무용의 현재화에 가장 관심이 많은 거장이다. 정구호와 찰떡궁합의 호흡을 선보이는 이유다. '솔(Soul), 해바라기'는 초연 당시 한국무용에서는 그간 낯설게 여겨지던 재즈 음악을 아울러 화제가 됐다. 초연부터 지난해 10주년 공연까지 독일 재즈그룹 '살타첼로'가 음악을 맡았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이번 '춘상'에서 소녀의 감수성이 넘치는 동작들을 구성한 배정혜는 "한국 전통을 선보이는 사람으로서 시대를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는 제 몸으로 손 사위까지 모든 안무의 하나하나를 직접 시연하며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조안무들의 힘을 많이 빌렸다"면서 "나이 먹은 사람이 움직이니 안 어울리더라고요. 한국춤도 이렇게 즐길 수 있구나는 느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웃었다.

춘과 몽 역에는 지난 6월 국립무용단 '리진'에서 연인 사이로 호흡을 맞추며 국립무용단의 차세대 간판 커플로 떠오른 이요음·조용진, 카리스마와 에너지를 겸비해 보다 원숙한 사랑을 그려낼 것으로 기대되는 송지영·김병조가 더블 캐스팅됐다. 이날 시연에서 연기력까지 갖춘 동작은 선보인 춘 역의 이요음은 "요즘 젊은이들을 정서와 시대 분위기를 담아 감정 이입이 빨리 됐다"고 즐거워했다.

'춘상'은 '2017-2018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개막작이다. 그간 국립창극단 작품이 꿰찼던 자리를 국립무용단이 대신했다.

안호상 국립극장 극장장은 "국립무용단이 새로운 장르를 연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면서 "지난 5년 동안 레퍼토리 시즌을 굳건하게 뒷받침해온 국립무용단의 과감한 신작"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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