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8.31 01:49

고미술 전문 화랑을 운영하는 정모씨는 작년 1월 말 미국의 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일본 석재 거북'이라고 적힌 흰색 공예품 사진을 찾아냈다. 정사각형의 도장 위에 고개를 치켜든 거북이가 올라앉은 모양새였다.
경매에 응찰한 정씨는 73차례 경합 끝에 9500달러(약 1080만원)에 낙찰받았다. 두 달 뒤 그는 운송·세관비로 1400만원가량을 들여 이 공예품을 국내로 들여왔다.
정씨가 전문가들에게 확인해보니 '공예품'은 일본 미술품이 아니라 조선 인조의 계비(繼妃)인 장렬왕후의 어보(御寶·사진)였다. 이 어보는 1676년(숙종 2년) 제작된 것이다. 정씨는 작년 9월 국립고궁박물관 측에 어보를 넘기며 2억5000만원에 사달라고 했다.
그러나 국립고궁박물관은 올해 1월 "장렬왕후 어보는 6·25 당시 도난당했고 미국 경매 사이트에서 불법으로 거래된 것"이라며 돈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한 후 어보를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정씨는 "도난품인 줄 몰랐고 정상 거래로 샀으니 내 사유재산"이라며 "어보를 돌려주든지 2억5000만원을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재판장 이상윤)는 30일 "국가(국립고궁박물관)는 정씨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고 어보를 돌려줄 필요도 없다"며 정씨 패소 판결을 내렸다. 정씨가 낙찰을 받을 당시 어보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었기 때문에 버지니아주법을 따라야 하는데, 버지니아주법은 도난품인 줄 모르고 샀다고 해도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우리 민법은 도난품인 줄 모르고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구입한 사람의 소유권은 보장해준다. 하지만 정씨가 미국에서 어보를 경매받았기 때문에 우리 민법이 아닌 미국 현지법을 우선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