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헌신하는 삶, 1분 1초가 아깝지 않죠"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7.08.28 03:02

한국인 첫 '반 클라이번' 우승자,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인터뷰

4일에 한번 美·유럽 오가며 연주
"결승 이틀 전부터 몸살 앓아… 혹독했지만 가장 값진 순간"

"우승자를 발표하기 직전이었어요. 카메라가 하나둘 제 앞으로 모이는 거예요. '어? 설마 나인가…'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데 제 이름이 불렸어요. '벙쪘다'고 할까요. 넋이 나갔죠. 시상식 끝나고 축하 인사를 받는데 그제야 살짝 눈물이 났어요."

지난 6월 미국 최고(最高) 피아노 경연대회인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선우예권(28)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최근 전 세계에서 동시 발매된 '2017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앨범'(데카 골드)을 알리기 위해 잠시 귀국한 그는 "우승 후 연주 기회가 열 배 가까이 늘었다"고 했다.

지난 두 달, 선우예권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콩쿠르 부상(副賞)으로 밀려드는 연주회를 소화하느라 사나흘에 한 번씩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장거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반 클라이번 재단과 영국 매니지먼트 키노트, 국내 소속사가 동시에 달라붙어 그의 일정을 관리한다. 연주료가 다섯 배 올랐고, 패션잡지 화보도 찍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라니까 저를 잘 몰랐던 유럽 관객들도 믿고 들어와 연주에 귀 기울여주세요. 그 기대치를 낮추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앞으로 제가 해내야 할 과제예요."


 

통통한 볼살 덕에 별명이 ‘곰돌이 푸우’인 선우예권. 세계 무대를 향해 본격 날갯짓을 시작한 그는 “내 삶을 음악에 헌신하는 삶으로 만들 수 있다면 1분 1초가 아깝지 않다”고 했다.
통통한 볼살 덕에 별명이 ‘곰돌이 푸우’인 선우예권. 세계 무대를 향해 본격 날갯짓을 시작한 그는 “내 삶을 음악에 헌신하는 삶으로 만들 수 있다면 1분 1초가 아깝지 않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운 선우예권은 20대의 대부분을 콩쿠르 도전으로 채웠다.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수석 졸업하고 2005년 전액 장학생으로 미국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해 라흐마니노프 상을 받으며 졸업했지만 늘 생활비가 모자랐다. 2008년 플로리다를 시작으로 2009년 인터라켄, 2012년 윌리엄 카펠과 피아노 캠퍼스, 2015년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어워드까지 주요 국제 콩쿠르만 따져도 일곱 차례 우승하며 상금으로 생계를 책임졌다.

매번 같은 연주복을 입고 나와 별명이 '단벌 신사'다. 2년 전 당대 최고 연주자들이 서는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한국인 최초로 독주회를 열었지만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연주용 피아노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다. 대신 학교 연습실에서 자정까지 피아노를 쳤다. 매네스 음대에서 전문연주자과정을 밟던 시절, 너무 지쳐 설움이 복받쳤다. "그래도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은 한 번도 없었어요."

2년 전 온 나라가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 소식으로 들썩일 때 선우예권은 이 콩쿠르 예선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다른 콩쿠르에서 우승한 지 이틀 만에 출전한 대회였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 후회하는 경우를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며 도전한 콩쿠르가 반 클라이번이다. 그는 "이틀에 한 번꼴로 큰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결선 이틀 전부터는 몸살을 앓아 혹독한 콩쿠르였지만 스물여덟 삶에서 가장 값진 순간이었다"고 했다.

선우예권은 "타고난 성격이 느긋한 편"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소리 내어 웃지도, 큰 몸짓을 하지도 않았다. 우승 상금 5만달러(약 5600만원)는 "부모님께 다달이 생활비로 보내려 한다"고 했다. 뮌헨의 단골 악보사로 달려가 마음껏 악보도 사들였다. "앞으로 연주해야 할 곡 중에 없는 악보가 너무 많아요.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은 외우고 있지만 또 샀어요. 제가 고꾸라질 때마다 위로를 받는 작곡가는 슈베르트. 고달픈 생을 살다 가서인지 밝은 노래 안에도 슬픔이 묻어 있거든요."

그는 "내 피아노도 밝음 속에 슬픔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제가 생각하는 슬픔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슴으로 붙잡고 있는 것. 목 놓아 내지르는 게 아니라 꾹꾹 눌러 담고 있다가 넘치면 툭 하고 가볍게 흐르는 게 슬픔인 것 같아요. 그래서 슈베르트와 브람스를 좋아하나 봐요." 선우예권은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어떤 연주를 들려드릴까에 대한 고민만 커졌을 뿐 달라진 건 없다"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