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지식 대결… 관객의 知的 호기심을 깨우다

  • 최보윤 기자

입력 : 2017.06.23 00:18

- '생각'을 자극하는 연극·뮤지컬
범죄론·과학 등 어려운 소재 한 편으로 쉽게 풀어내 인기

극단 맨씨어터 창립 10주년 기념작 연극‘프로즌’의 한 장면.
극단 맨씨어터 창립 10주년 기념작 연극‘프로즌’의 한 장면. 정신과 의사 아그네샤(앞)가 연쇄 살인범인 랄프(뒤)의 범죄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맨씨어터
뇌과학을 전공한 정신의학자(연극 '프로즌')의 범죄론, 천문학 박사와 기생충학 박사(연극 '신인류의 백분토론') 등이 벌이는 창조론과 진화론 대결, 역사학자와 국제분쟁전문기자(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의 역사·행복에 대한 토론….

연기자들의 대사만 들어도 흥미진진한 교양서를 읽는 느낌이다. 최근 TV 프로그램 등에서 지적(知的) 유희를 즐기는 '인문학 예능'이 큰 인기를 끄는 것처럼 공연계에도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작품들이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소위 '사피오섹슈얼(sapiosexual·상대의 센스·지성 등에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사람) 관객'이 과녁이다.

오는 7월 9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시어터 무대에 오르는 '신인류의 백분토론'(연출 민준호)은 지난 2월 프리뷰 공연에서 평균 객석 점유율 102%를 기록하며 화제가 된 바 있다. 인류의 기원에 대해 창조론과 진화론을 주장하는 패널들이 100분간 쉴 새 없이 서로의 주장을 반박한다. 복잡한 과학 문제를 코믹하게 처리하려는 일부 대목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현장에선 "교양 다큐 한 편을 본 기분" "과학도 재밌다"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영국 극작가 브리오니 래버리의 대표작인 연극 '프로즌'(연출 김광보)은 인간 범죄의 기원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한다. 연쇄살인범이자 소아성애자 랄프를 두고 정신과 의사 아그네샤는 범죄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 정신분석적 접근을 한다. 아그네샤는 "랄프의 범죄는 양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 전두엽 손상을 입어 나온 뇌 손상의 결과이자 질병"이라는 일방적이면서도 집요한 주장을 펼친다. 소재 때문에 자칫 선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연극은 그보다는 죄의식과 용서에 관해 철저하게 성찰한다. 딸아이 로나의 죽음에 방황하다 강한 정신력을 보여주는 주인공 낸시가 극에 묵직한 균형감을 준다. 오는 7월 16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25일까지 서울 소월아트홀에서 공연되는 창작 뮤지컬 '죽일테면 죽여봐'(연출 이강혁·권은정)의 원작자는 건국대의학전문대학원 하지현 교수다. 정신과 전문의이기도 한 그는 인간 본성을 파헤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대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캐릭터에 녹여냈다. 27일부터 드림아트센터 무대에 오를 '그와 그녀의 목요일'(연출 황재헌)은 저명한 역사학자 정민이 은퇴한 국제 분쟁 전문 기자 연옥에게 매주 목요일마다 토론을 제안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결국 인생의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다. 지난 8일 1차 티켓 오픈에서 예매율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생각'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인기를 끄는 데에 대해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확실성이 커지는 급속한 변화 속에 자신을 되돌아보고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잠시 호흡을 멈추고 깊이 생각할 여유를 얻고 싶어 하는 마음의 반영"이라고 말했다. 하지현 교수는 "정보 접근성이 확산되고 정보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좀 더 정제되고 깊이 있는 내용을 보고 싶어하는 대중이 큰 폭으로 늘었다는 것"이라며 "마치 강연처럼 고급 정보를 쉽게 풀어주는 문화가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