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극장 10여년 만에 폐관…"게릴라시대 마감하고 새출발"

  • 뉴시스

입력 : 2017.04.17 10:03

게릴라극장
이윤택 예술감독 "새 공간 '30스튜디오', 난공불락 아지트 만들 것"
황혼녘의 아련한 빛깔을 떠올리게 하는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흰색 세트 위에 내리쬘 때마다 먹먹해졌다.

16일 오후 혜화동에 위치한 게릴라극장의 폐관 공연 '황혼'(연출 채윤일)의 마지막날 80여석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약 90동안 애잔함에 휩싸였다.

게릴라극장은 1986년 부산에 본거지를 두고 창단된 극단인 연희단거리패의 서울 전진기지였다. 대학로 중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오프 대학로'에 위치한 극장으로 이 극단이 창단 20주년을 맞아 2006년 혜화동 지금의 터로 옮겼다.

1층에 극장을 만들어 소극장은 어두컴컴한 지하에만 있다는 편견을 깬 게릴라극장은 '소극장 연극의 메카'로 통했다. 연희단거리패의 소극장 레퍼토리와 더불어 명망 있는 연극인들의 다양한 실험의 장이 돼왔다. 연희단거리패 외에 극단 코끼리만보의 김동현 연출,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연출, 극단 드림플레이 테제21의 김재엽 연출 등 기라성 같은 연극인들이 이 공간을 애용했다.

돈이 없는 극단에게는 대관료 대신 수익의 절반만 받고 극장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동안 아마추어 작품까지 합하면 무려 200여편이 공연됐다.

하지만 이윤택 예술감독이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등의 영향으로 각종 지원금이 끊기고 재정 상황이 악화되면서 폐관이 결정됐다.

오스트리라 작가 페터 투리니 작품이 원작인 '황혼'은 게릴라극장의 이런 상황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알프스 산속에 사는 맹인,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무원의 이야기다. 지난해 국내 11월 게릴라극장에서 초연했다. 명계남의 자연스런 연기, 연희단거리패의 대표이기도 한 김소희의 혼 실린 연기의 앙상블이 특기할 만하다.

세상에서 밀려나간 예술가들의 이야기라 게릴라극장의 마지막 상황과 겹쳐진다. 맹인과 사무원의 인연은 연극판에 몸을 담았던 과거까지 복기하게 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헷갈린다. 이를 통해 연극은 연극에 대한 연극, 연기에 대한 연극 등 은유가 가득해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런데 상황을 감성적이고 칙칙하게 풀어낸 것이 아니라 지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 도발적으로 풀었다. 고통의 아픔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게릴라극장의 폐관을 슬프게만 보지 말자는 김소희 대표와 이윤택 예술감독과의 태도와도 적확하다.

이날 오후 3시 공연 전부터 일찌감치 극장 앞을 찾은 관객들은 극장 앞에서 아쉬움을 달래며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연희단거리패의 오랜 팬이라는 30대 여성 관객은 "대학로 중심에서 멀지만, 그곳과는 정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연극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며 "오랜 팬이었는데 아쉽다"고 했다.

이날 공연 뒤에는 폐관식이 진행됐다. 영상으로 게릴라극장의 지난날 모습 등이 상영됐다. 식이 성대하게 치러지는 대신 평소 이 극장을 아껴준 관객, 관계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먹고 추억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술자리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전 국립극단 예술감독), 배우 손숙, 인간문화재 하용부, 김윤택 국립극단 예술감독, 세종문화회관 이승엽 사장, 뮤지컬평론가인 고희경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게릴라극장에서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를 올린 연출가인 박근형 극단 골목길 대표, 연출가 김철리, 유인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사무국장 등 공연계 거물들이 총출동했다.

연희단거리패가 운영한 우리극연구소를 이윤택 예술감독, 윤광진 연출가(용인대 연극학과 교수) 등과 함께 이끌며 게릴라극장에 수차례 작품을 올린 이병훈 연출가는 이 공간이 지속할 수 없는 한국의 연극 환경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이 연출은 "연극은 수공업적인 예술이라 직접 공을 들여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게릴라극장은 진주 같은 곳이었다"며 "이런 극장이 지속하지 못하는 풍토에서 연극의 다양화가 불가능해지고 상업적인 것만 주를 이루게 된다"고 말했다.

최준호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연극원 교수는 "무대와 객석의 배치가 좋고 층고도 높아 소극장 작업하는 예술가에게 소중한 공간인데 안타깝다"며 "이번이 계기가 돼 공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공간에 대한 지원과 공공재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겼으면 한다"고 짚었다.

연희단거리패가 서울에서 연극할 공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해 10월 명륜 3가에 새 공간인 '삼공(30)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이곳에서 연희단거리패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열겠다는 계획이다.

흉가,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알려진 이곳을 게릴라극장 터의 반값에 샀다. '30'은 올해 연희단거리패가 지난해 맞은 30주년을 뜻한다. 28일 정식 개관한다. 연희단거리패 본거지인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이 오가며 머무를 수 있는 숙소 등을 갖췄다.

지금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대신 1층에 소규모의 카페가 들어서 있던 대학로 샘터 건물 파랑새극장의 옛 카페를 떠올리며 이윤택 예술감독은 같은 공간도 마련했다.

이날 찾아와준 관객과 관계자들에게 고맙다며 거듭 고개를 숙인 김소희 대표는 "30스튜디오는 카페도 있고 마당도 있어 관객분들을 만나는 건 물론 다른 예술가분들하고도 협업할 수 있는 공간도 생겼다"며 "게릴라극장은 문 닫지만, 연희단거리패가 새로운 장을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게릴라극장이 왕성할 당시 블랙리스트 파동으로 마음고생을 한 이윤택 예술감독은 "새 시대가 오고 변화의 시대가 오는데 나이가 들어 계속 게릴라를 못할 듯했다"며 "이제 게릴라 시대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변화를 시대를 맞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특정한 색깔의 이름 대신 '30스튜디오'라는 비교적 평범한 이름을 달았다는 그는 "의도적으로 성격과 색깔을 지운 것"이라며 "갈수록 연극하기가 힘들어진다.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고 연극을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인데 지원금을 안 받더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먹고 자고 연습하고 커피와 책을 파는 30스튜디오를 구상했다"고 말했다.

"자가 발전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연극을 해나가고 싶어요. 제가 연희단거리패에 없어도 공연이 계속될 수 있는 불굴의 난공불락 아지트를 만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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