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4.06 09:41

■ '제2의 윤이상' 재독작곡가 박영희 인터뷰
"난 '한국 여성 작곡가 박영희'" 자긍심
후배지원위해 '국제 박영희 작곡상' 제정
"작곡은 우리의 직업이고, 인생을 걸고 하는 것이죠. 단지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닌 시민으로서 귀를 열고 눈을 열고 작곡하는 사람인 것이에요. 화려하게 사는 줄만 아는데 아니죠."
4일 오후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만난 재독 작곡가 박영희(71)는 "윤이상 선생님이 한국에 자주 와서 활동을 했다면 작곡가와 창작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박 작곡가는 지난달 31일 개막해 오는 9일까지 열리는 '2017 통영국제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통영을 찾았다. 통영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음악혼을 기리기 위한 이 음악제에서 박 작곡가의 곡은 여러번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녀가 참석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제2의 윤이상' '유럽 현대음악계의 대모'로 통하는 그녀는 "윤이상 선생님을 위한 국제음악제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라며 "이 아름다운 도시에 와보니까, 이토록 그리워한 고향을 선생님이 다시 못 찾은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윤이상은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돼 2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독일로 건너갔다. 이후 고국 땅을 밟고자 했으나 정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95년 베를린에서 영면했다. 최근 그의 위상과 업적이 조금씩 조망되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 그 작업이 더 활발해졌다.
"윤이상 선생님의 소리 자체는 유럽에서도 새로웠어요. 음악이 주는 힘이라고 할까요, 그 열정이 새로운 경향의 미학을 가진 음향을 만들었죠. 지금까지 없던 작품을 태어나게끔 만드신 분이니까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거죠."
이번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윤이상 관련 다양한 심포지엄도 열리고 있다. 오는 6일에는 발터 볼프강 슈파러 국제윤이상협회 회장이 '윤이상과의 만남'을 주제로 관객들을 만나는데 박 작곡가 역시 함께 참여한다.
"다른 분들은 주로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학적인 면에서 조명을 하시는데 저는 그 분이 작곡가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셨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예요. 학생들이 많이 참여할 예정인데 작품 자체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분이 얼마나 창작에 대한 열정이 컸는지, 얼마나 힘든 삶을 보내셨는지 함께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많이 질문을 받고 받을 겁니다. 제가 한창 공부할 때인 60년~70년만 해도 윤이상 선생님 악보를 몰래 돌려가면서 봤어요."
충북 청주 출신인 박 작곡가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이후 독일 유학을 결심한 계기는 1971년 시민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원경수가 지휘의 윤이상의 '예악(禮樂)'을 듣고나서다.
"벌써 50년이 다 돼가지만 그 때 소리를 여전히 잊을 수 없어요. 어떻게 저렇게 황홀한 소리를 작곡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유학을 떠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남성 작곡가의 문하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예술가가 선배 예술가의 문하에 들어가거나 사사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어요, 무릎을 꿇고 들어가는 경우, 그 분의 주변에서 맴도는 경우. 저는 남성이 지배를 하는 사회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윤이상 선생님이 그런 점을 인정해주시고 항상 따듯하게 대해주셨죠."
박 작곡가는 지휘계와 더불어 여성에게 유리천장이 단단하기로 유명한 작곡계에서 여성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게 물꼬를 튼 주인공이다. 특히 1994년 브레멘 예술대학교에 동양인으로는 물론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작곡과 주임 교수로 임명됐다. 이후 이 대학에서 부총장까지 지냈다.
또 여성 작곡가는 처음으로 1978년 스위스 보스빌 콩쿠르 등에서 우승한 이후 여성에게 힘든 관문이던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 등 여러 페스티벌로부터 곡을 위촉받았다.
"당시 독일 사회에도 여성에게는 유리벽이 단단했죠. 하지만 보스빌 콩쿠르 우승 이후부터는 저를 받아주기 시작하더라고요. 특히 1980년 독일 도나우에싱겐 현대음악제에서 초연한 교향곡 '소리(SORI)'가 다행히 성공했는데 그 곡을 위촉한 분께 겁나지 않았냐고 묻자 웃으시면서 결과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박 작곡가는 클라라 슈만(1819~1896) 같은 여성 작곡가의 곡을 들으면 여전히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 분들은 오래시간을 기다려서 인정받았어요. 지금은 '여성 작곡가'가 아닌 '작곡가'로서 자신의 음악을 남기게 됐죠. 그런 기다림에 대한 공감이 가요."
동양철학에 서구의 작곡 기법을 녹여내는 등 동서양을 아우르는 클래식음악계 1.5세대 한류스타인 박 작곡가는 명성에 비해 비교적 한국에는 덜 알려져 있다. 지난달 국내 최고 권위의 대원음악상 특별공헌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등 뒤늦게 조명되고 있다.
박 작곡가는 섭섭하지 않았냐는 우문에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웃으며 말했다. "저는 어차피 한국 사회에 끈이 없었어요. 덕분에 자유롭고 부담이 없었죠. 제가 정말 유명해지는 걸 목표로 삼았다면, 한국에서 끈을 찾으려고 했겠죠. 유럽에 간 것은 저의 결정이었고 덕분에 큰 자유로움을 얻었어요."
한국의 두 번째 사제로 종교를 떠나 민초들을 위해 힘쓴 최양업(1812~1861) 신부를 소재로 한 오페라를 쓰고 있는 박 작곡가는 겸손이 몸에 배어 있었다. 온화한 얼굴로 직업, 나이에 상관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그런 박 작곡가는 최근 두 상을 제정했는데 이 역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음악과 후배 작곡가를 위한 마음 때문이었다.
주독일한국문화원 등과 함께 만든 '제1회 국제 박영희 작곡상'은 국제 콩쿠르로 국악기를 반드시 하나 이상 사용해야 한다.
"외국 사람들이 국악기를 어떻게 배우냐고 묻는 분들도 계신데 서울대 음대에서 국악기 소리를 분석해서 인터넷에 올려놓는 등 소스가 있어요. 하지만 가야금, 거문고 등 영어로 된 국악기 교재는 부족하죠. 우리가 남의 것을 배웠으니, 우리도 우리 것을 알려줘야죠.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음악은 그렇게 서로 벗 삼을 수 있어요."
도올 김용옥이 '책상에 놓여진 비파를 보며 생각한다'는 뜻으로 지어준 파안(琶案)을 자신의 로마자 이름표기자에 넣어 '영희 박 파안(Younghi Pagh-Paan)'이라고 쓰는 박 작곡가는 자비를 털어 35세 이하 작곡가를 대상으로 하는 '파안 생명나무 작곡가' 상도 제정했다. "국제적인 상이 하나 있으면 한국의 젊은 작곡가를 위한 상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상금 액수는 많지 않지만 응원의 의미가 큽니다."
박 작곡가에도 인생의 스승들이 있었다. 윤이상은 물론이요, 윤이상처럼 역시 통영이 고향인 소설가 박경리(1926~2008)에게서는 그녀의 책을 통해 한국과 그 문화, 정신에 대해 배웠다고 했다. 가야금 거장 황병기(82)으로부터는 대학원에서 가야금을 배웠는데 "악보를 세계에서 팔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해준 이가 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름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요. 박종국 선생님이었어요. '너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평생 남았고, 그 '훌륭한 사람'은 마음이 큰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죠. 저도 이 훌륭한 분들의 뜻을 잇고, 후배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요."
여러 수식을 달고 다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한국 여성 작곡가 박영희'라고 했다. "한국 여성으로서 긍지가 강하다"며 눈시울을 붉힌 그녀는 "독일에서 부총장을 맡은 걸 가장 높이 사시는데 그건 한 직책에 불과해요. 제가 잘난 것이 아니라, 한국 여성이 아니었으면 그 일을 못했을 거"라고 울먹거렸다.
"독일에서도 제가 한국 여성이라는 걸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어요. 제가 한국에서 배워 와서 독일로 유학 가 몇 년 안에 콩쿠르에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릴 수 있었죠. 한국에서 든든히 거름을 갖고 가 그곳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거예요. 한국 여성들은 평소 몸가짐이 조심스럽지만 굉장히 강하기도 해요. 그 힘을 독일에서 온전하게 알아봐준 거죠."
후배 여성작곡가들을 위한 조언을 청하자 "한국 여성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했다. 다만 "무대 위에서 여성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무대 위에서는 수줍어하면 안 됩니다.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 나서야 하거든요."
"난 '한국 여성 작곡가 박영희'" 자긍심
후배지원위해 '국제 박영희 작곡상' 제정
"작곡은 우리의 직업이고, 인생을 걸고 하는 것이죠. 단지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닌 시민으로서 귀를 열고 눈을 열고 작곡하는 사람인 것이에요. 화려하게 사는 줄만 아는데 아니죠."
4일 오후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만난 재독 작곡가 박영희(71)는 "윤이상 선생님이 한국에 자주 와서 활동을 했다면 작곡가와 창작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박 작곡가는 지난달 31일 개막해 오는 9일까지 열리는 '2017 통영국제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통영을 찾았다. 통영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음악혼을 기리기 위한 이 음악제에서 박 작곡가의 곡은 여러번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녀가 참석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제2의 윤이상' '유럽 현대음악계의 대모'로 통하는 그녀는 "윤이상 선생님을 위한 국제음악제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라며 "이 아름다운 도시에 와보니까, 이토록 그리워한 고향을 선생님이 다시 못 찾은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윤이상은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돼 2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독일로 건너갔다. 이후 고국 땅을 밟고자 했으나 정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95년 베를린에서 영면했다. 최근 그의 위상과 업적이 조금씩 조망되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 그 작업이 더 활발해졌다.
"윤이상 선생님의 소리 자체는 유럽에서도 새로웠어요. 음악이 주는 힘이라고 할까요, 그 열정이 새로운 경향의 미학을 가진 음향을 만들었죠. 지금까지 없던 작품을 태어나게끔 만드신 분이니까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거죠."
이번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윤이상 관련 다양한 심포지엄도 열리고 있다. 오는 6일에는 발터 볼프강 슈파러 국제윤이상협회 회장이 '윤이상과의 만남'을 주제로 관객들을 만나는데 박 작곡가 역시 함께 참여한다.
"다른 분들은 주로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학적인 면에서 조명을 하시는데 저는 그 분이 작곡가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셨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예요. 학생들이 많이 참여할 예정인데 작품 자체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분이 얼마나 창작에 대한 열정이 컸는지, 얼마나 힘든 삶을 보내셨는지 함께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많이 질문을 받고 받을 겁니다. 제가 한창 공부할 때인 60년~70년만 해도 윤이상 선생님 악보를 몰래 돌려가면서 봤어요."
충북 청주 출신인 박 작곡가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이후 독일 유학을 결심한 계기는 1971년 시민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원경수가 지휘의 윤이상의 '예악(禮樂)'을 듣고나서다.
"벌써 50년이 다 돼가지만 그 때 소리를 여전히 잊을 수 없어요. 어떻게 저렇게 황홀한 소리를 작곡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유학을 떠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남성 작곡가의 문하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예술가가 선배 예술가의 문하에 들어가거나 사사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어요, 무릎을 꿇고 들어가는 경우, 그 분의 주변에서 맴도는 경우. 저는 남성이 지배를 하는 사회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윤이상 선생님이 그런 점을 인정해주시고 항상 따듯하게 대해주셨죠."
박 작곡가는 지휘계와 더불어 여성에게 유리천장이 단단하기로 유명한 작곡계에서 여성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게 물꼬를 튼 주인공이다. 특히 1994년 브레멘 예술대학교에 동양인으로는 물론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작곡과 주임 교수로 임명됐다. 이후 이 대학에서 부총장까지 지냈다.
또 여성 작곡가는 처음으로 1978년 스위스 보스빌 콩쿠르 등에서 우승한 이후 여성에게 힘든 관문이던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 등 여러 페스티벌로부터 곡을 위촉받았다.
"당시 독일 사회에도 여성에게는 유리벽이 단단했죠. 하지만 보스빌 콩쿠르 우승 이후부터는 저를 받아주기 시작하더라고요. 특히 1980년 독일 도나우에싱겐 현대음악제에서 초연한 교향곡 '소리(SORI)'가 다행히 성공했는데 그 곡을 위촉한 분께 겁나지 않았냐고 묻자 웃으시면서 결과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박 작곡가는 클라라 슈만(1819~1896) 같은 여성 작곡가의 곡을 들으면 여전히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 분들은 오래시간을 기다려서 인정받았어요. 지금은 '여성 작곡가'가 아닌 '작곡가'로서 자신의 음악을 남기게 됐죠. 그런 기다림에 대한 공감이 가요."
동양철학에 서구의 작곡 기법을 녹여내는 등 동서양을 아우르는 클래식음악계 1.5세대 한류스타인 박 작곡가는 명성에 비해 비교적 한국에는 덜 알려져 있다. 지난달 국내 최고 권위의 대원음악상 특별공헌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등 뒤늦게 조명되고 있다.
박 작곡가는 섭섭하지 않았냐는 우문에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웃으며 말했다. "저는 어차피 한국 사회에 끈이 없었어요. 덕분에 자유롭고 부담이 없었죠. 제가 정말 유명해지는 걸 목표로 삼았다면, 한국에서 끈을 찾으려고 했겠죠. 유럽에 간 것은 저의 결정이었고 덕분에 큰 자유로움을 얻었어요."
한국의 두 번째 사제로 종교를 떠나 민초들을 위해 힘쓴 최양업(1812~1861) 신부를 소재로 한 오페라를 쓰고 있는 박 작곡가는 겸손이 몸에 배어 있었다. 온화한 얼굴로 직업, 나이에 상관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그런 박 작곡가는 최근 두 상을 제정했는데 이 역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음악과 후배 작곡가를 위한 마음 때문이었다.
주독일한국문화원 등과 함께 만든 '제1회 국제 박영희 작곡상'은 국제 콩쿠르로 국악기를 반드시 하나 이상 사용해야 한다.
"외국 사람들이 국악기를 어떻게 배우냐고 묻는 분들도 계신데 서울대 음대에서 국악기 소리를 분석해서 인터넷에 올려놓는 등 소스가 있어요. 하지만 가야금, 거문고 등 영어로 된 국악기 교재는 부족하죠. 우리가 남의 것을 배웠으니, 우리도 우리 것을 알려줘야죠.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음악은 그렇게 서로 벗 삼을 수 있어요."
도올 김용옥이 '책상에 놓여진 비파를 보며 생각한다'는 뜻으로 지어준 파안(琶案)을 자신의 로마자 이름표기자에 넣어 '영희 박 파안(Younghi Pagh-Paan)'이라고 쓰는 박 작곡가는 자비를 털어 35세 이하 작곡가를 대상으로 하는 '파안 생명나무 작곡가' 상도 제정했다. "국제적인 상이 하나 있으면 한국의 젊은 작곡가를 위한 상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상금 액수는 많지 않지만 응원의 의미가 큽니다."
박 작곡가에도 인생의 스승들이 있었다. 윤이상은 물론이요, 윤이상처럼 역시 통영이 고향인 소설가 박경리(1926~2008)에게서는 그녀의 책을 통해 한국과 그 문화, 정신에 대해 배웠다고 했다. 가야금 거장 황병기(82)으로부터는 대학원에서 가야금을 배웠는데 "악보를 세계에서 팔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해준 이가 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름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요. 박종국 선생님이었어요. '너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평생 남았고, 그 '훌륭한 사람'은 마음이 큰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죠. 저도 이 훌륭한 분들의 뜻을 잇고, 후배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요."
여러 수식을 달고 다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한국 여성 작곡가 박영희'라고 했다. "한국 여성으로서 긍지가 강하다"며 눈시울을 붉힌 그녀는 "독일에서 부총장을 맡은 걸 가장 높이 사시는데 그건 한 직책에 불과해요. 제가 잘난 것이 아니라, 한국 여성이 아니었으면 그 일을 못했을 거"라고 울먹거렸다.
"독일에서도 제가 한국 여성이라는 걸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어요. 제가 한국에서 배워 와서 독일로 유학 가 몇 년 안에 콩쿠르에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릴 수 있었죠. 한국에서 든든히 거름을 갖고 가 그곳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거예요. 한국 여성들은 평소 몸가짐이 조심스럽지만 굉장히 강하기도 해요. 그 힘을 독일에서 온전하게 알아봐준 거죠."
후배 여성작곡가들을 위한 조언을 청하자 "한국 여성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했다. 다만 "무대 위에서 여성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무대 위에서는 수줍어하면 안 됩니다.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 나서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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