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풍경, '라 보엠' 한 장면 같더라"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7.04.05 00:30

[국립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주역 맡은 베이스 아나스타소프]

"베이스에게 이 역할은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인물"

"연습이 없는 날 강 저쪽으로 놀러 갔다가 활기 넘치는 세상을 만났어요. 이태원이었죠. 골목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가지각색 음식을 맛보는데 불현듯 오페라 '라 보엠'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주인공 청춘들이 2막에서 성탄절을 즐기려고 찾아간 카페 모뮈스 앞 광장 말예요."

불가리아 출신 베이스 오를린 아나스타소프(41)에게 서울은 푸치니 오페라의 한 장면이었다. 스무 살에 모국에서 오페라 '아이다'의 이집트 왕으로 데뷔, 3년 뒤인 1999년 플라시도 도밍고가 주관하는 오페랄리아 콩쿠르에서 우승한 아나스타소프는 같은 해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에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바실리오로 데뷔하면서 21년간 승승장구한 성악가. 런던 코벤트 가든, 뉴욕 메트로폴리탄, 빈 국립오페라 등에서 '투란도트'의 티무르, '아틸라'의 아틸라로 활약했고, 2011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는 지아난드레아 노세다가 지휘하는 무소륵스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에 주역으로 출연해 극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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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성악가' 하면 흔히 테너를 떠올린다. 그보다 주목을 덜 받는 베이스로서 사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오를린 아나스타소프는“더 조용히 사는 것”이라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오는 20일부터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김학민)이 선보이는 '보리스 고두노프'에 역시 주역으로 서는 그는 "베이스에게 이 역할은 평생을 다 바쳐도 극이 끝나갈 무렵 '아직 절반도 못 따라갔네!'란 소리를 절로 내뱉게 하는 인물"이라며 "오페라에 나오는 모든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질병이나 살인이 아닌 양심의 가책으로 죽는다"고 했다. "10년 전 제안받았지만 내 나이가 너무 어린 것 같아 망설였더니 니콜라이 기아우로프(불가리아 베이스)가 충고해줬어요. 60세에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역할이니 목소리가 잘 나올 때 하라고요(웃음)."

1584년 러시아의 이반 4세가 사망하고 병약한 표도르 1세가 제위에 오르자 실권은 처남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돌아간다. 이반 4세에게는 드미트리라는 아들도 있었지만 아홉 살에 고두노프가 보낸 암살자한테 죽는다. 고두노프는 황제가 되지만 백성 사이에서는 드미트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던 고두노프는 아들을 불러 유언한 후 쓰러져 숨을 거둔다.

이 작품에서 고두노프만큼 극한의 감정을 쏟아내야 하는 노래는 없다. 정통성 없는 고두노프가 야욕을 드러내고 공포에 휩싸일 때 극은 생명력을 얻는다. 대관식 장면에서 백성이 자신에게 달려들 때 눈이 뒤집히며 무너져내리는 순간이 압권이다.

"목소리는 눈빛이나 몸짓처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저는 성악가란 가수가 아니라 연기자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가수도 똑같은 방식으로 5분간 노래하면 듣는 사람이 지루해지거든요." ▷보리스 고두노프=20~2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1588-2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