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르살라제 첫 내한…피아니스트의 '정언명령'

  • 뉴시스

입력 : 2017.02.20 09:54

엘리소 비르살라제
피아니스트에게 내려진 '정언명령'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범 같은 무대였다.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엘리소 비르살라제(75)는 16일 저녁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매 곡마다 연주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듯 거침없이 연주해나갔다.

놀라웠던 건 화려한 타건(打鍵)술에도 실력과 기교의 과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이 끊어질 듯 광폭으로 달리다가도 섬세하고 미세한 감각으로 넘어가는 전환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유려했다. 포효하는 흰 건반, 그 뒤를 받쳐주는 검은 건반 사이에 세밀한 감정의 뿌리를 촘촘히 심어놓는 묘도 발휘했다.

이런 피아노의 품격 있는 소리는 비르살라제의 견고한 성채 같은 명성과 피아니즘이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다.

'살아 있는 피아노의 전설'로 통하는 이 거장이 2시간 남짓한 첫 내한공연에서 보여준 관록이다.

슈만(피아노를 위한 아라베스크 C장조, Op.18·피아노를 위한 환상소곡집, Op.12)이 이처럼 다양한 멜로디와 리듬의 얼굴을 가진 작곡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13번 A장조의 품격 역시 더할 나위 없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공연장 내에 퍼지는 음 하나하나에도 악력과 장력이 있다는 걸 가르쳐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제2번 d단조, Op.14였다. 이 곡을 연주하는 순간 비르살라제 앞에 놓인 검정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블랙홀이 돼 청중들의 시간을 빨아들였다. 다양하고 강렬한 음계의 향연인 이 곡을 비르살라제는 유려하면서도 변화무쌍하게 탐험했다. 고요하고 명징한 구조가 순간순간 드러날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본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장식한 리스트(헌정·스페인 랩소디)는 그 뻐근해진 가슴을 우아하게 만져주는 위로였다.

만 75세라고 하기에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영롱한 소리와 체력도 놀라웠다. 모차르트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쇼팽의 피아노를 위한 마주르카 제21번과 피아노를 위한 왈츠 제2번 등 앙코르 3곡을 들려줄 때까지 처음 내뿜었던 힘과 열기가 여전했다.

연주 내내 카리스마로 분위기를 장악하다 곡이 끝난 뒤 검은색 단발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기며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은 위엄 뒤에 숨겨진 매력도 느끼게 했다.

이처럼 성스럽고 경건한 첫 내한공연을 만나 본 적이 얼마 만인가. 이름값이나 거장의 예우 차원이 아닌, 순수하게 연주만으로도 이날 공연은 객석 곳곳에서 찬사로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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