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2.27 00:35
[금관문화훈장 받은 임영웅 대표]
'연극 소년'에서 전업 연출가로… 60여년간 연극계에 기여한 공로
그는 '연극 소년'이었다. 휘문중 1학년 때인 1948년 '얄개전'의 작가인 조흔파 교사가 "국어 실력이 좋다"며 연극에 참여시켰다. '마의태자'에서 '대신2'쯤 되는 단역을 맡은 뒤로 소년의 인생은 달라졌다. "살아 있는 배우가 살아 있는 관객 앞에서 살아 있는 이야기를 하는 예술… 이런 예술은 연극 말고는 없다는 걸 알았지요."

첫 연출작은 스물한 살 때인 1955년 '사육신'이었다. 신문기자와 방송국 PD 생활도 했지만 연극계 사람들이 그를 놔두지 않았다. 1966년 국산 뮤지컬 1호로 역사에 남은 '살짜기 옵서예' 연출을 맡은 뒤로 전업 연출가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국립극단의 '환절기'(오태석 작)에 이어 1969년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사뮈엘 베케트 작)를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그 뒤로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공연되는 한국 연극계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됐다.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부조리극으로 보지 않았어요." '고도' 성공의 비결에 대해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그건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등장인물들이 그렇게 살아도 세상이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얘깁니다." 그의 '고도' 해석에는 한국적인 해학과 활기가 넘쳤고, 1990년 베케트의 고향인 아일랜드 더블린 공연 때는 숱한 신문들이 공연 사진을 싣고 '동양에서 온 고도를 기다릴 가치가 있다'며 흥분했다.
텍스트 분석을 통해 무대를 정교하게 계산하고 장면마다 배우들의 동작, 표정, 톤을 지시하는 완벽주의 때문에 배우들로부터 '호랑이' '임틀러' 같은 별명도 얻었다. 1985년 서교동 자택을 헐고 세운 산울림소극장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와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같은 유명작이 이곳 무대에 올랐다. 그는 지금까지 모두 250편 넘는 작품을 연출했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연극을 하면서 연극하기 어렵다는 말만 하면 안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잘 만든 연극을 보러 올 관객은 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