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老 철학자들 "내가 이러려고 무대 올라갔나"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6.11.21 00:36

풍자극 '웃음을 찾습니다'… 배우가 된 학자들, 시국 비판

책상 위로 올라간 '칠득이'에게 친구 '팔푼이'가 "너 거기 올라간 건 좋은데, 멋지게 내려올 줄도 알아야 돼"라고 쏘아붙인다. 당장 내려오라는 호통 앞에서 칠득이가 투덜거린다. "내가 이러려고 올라갔나!" 객석에선 웃음과 박수가 터졌다. 지난 18일 저녁 서울 충무아트센터 컨벤션홀에서 공연된 연극 '웃음을 찾습니다'였다.

철학자들이 연극을 통해 시국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이 주최한 '웃음을 찾습니다'는 연구실을 박차고 나온 철학자들의 특별한 무대였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손봉호 나눔국민운동본부 대표,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 곽영훈 세계시민회장 등이 배우로서 직접 무대에 섰다.

지난 18일 풍자극 ‘웃음을 찾습니다’에 출연한 김형석(맨 오른쪽) 연세대 명예교수, 이명현(맨 왼쪽) 전 교육부 장관 등이 열연을 펼치고 있다.
지난 18일 풍자극 ‘웃음을 찾습니다’에 출연한 김형석(맨 오른쪽) 연세대 명예교수, 이명현(맨 왼쪽) 전 교육부 장관 등이 열연을 펼치고 있다.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종종 대사 처리가 힘겨워 보이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들의 연기는 아마추어치고는 능숙한 편이었고 철학적 내용을 담은 부분에선 힘이 실렸다. 처음엔 "문화융성위원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이거 김영란법에 걸려" 같은 풍자 대사로 웃음을 끌어내더니, 뒤로 갈수록 "국정 농단을 막기 위해선 인재 육성과 대중 계몽이 필요하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연극은 삶에 대한 허무감으로 괴로워하는 사업가 K회장(김형철 연세대 교수)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젊은이를 내 후계자로 삼겠다'며 지원자를 면담하는 우화적인 이야기로, 그 속에 철학 강의를 방불케 하는 심도 있는 내용을 담았다. 낭만주의적 삶을 설파하는 '앗싸아'(이상훈 전 대진대 산학부총장),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는 '참하나'(손봉호 대표), 정치적 이상주의자 '철인몽'(이택호 육사 명예교수)에 이어 등장한 '오그대'(김성진 한림대 명예교수)가 '인간 존중을 통한 나눔의 삶'을 주장해 합격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 역을 맡은 96세의 김형석 교수는 "대한민국에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긴 대사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극본을 쓴 김광수 전 한신대 교수는 "지난 8월부터 연극을 준비했는데 점점 더 큰 사건들이 터져 대본을 22번 고쳐 썼다"며 "현 사태를 현상만 보지 말고 좀더 근원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연극을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