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무대 홀로 채운 여제의 絃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6.11.21 00:36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바흐 무반주 전곡 연주

세 시간에 걸쳐 바흐의 무반주 전곡을 들려준 정경화.
세 시간에 걸쳐 바흐의 무반주 전곡을 들려준 정경화. /크레디아

'바이올린 여제(女帝)'의 마지막 활 놀림은 눈 부신 햇살처럼 객석에 내리꽂혔다. 19일 오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8)의 바흐 무반주 전곡(全曲) 리사이틀이 막 내렸다. 관객 2200명은 모두 일어나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피아노 반주 없이 손에 쥔 작은 악기만을 벗 삼아 거대한 건축과도 같은 역작을 쌓아올린 정경화는 청중을 향해 두 팔 벌려 하트를 날렸다. 바이올린 배운 지 63년. 평생 꿈꿨던 바흐 소나타와 파르티타 여섯 곡을 하루에 소화해 개운한 얼굴이었다.

바흐가 1720년 이전에 작곡한 소나타 세 곡과 파르티타 세 곡은 둘 이상의 현(絃)을 동시에 누르거나 화음이 복잡하게 얽혀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연주 시간만 2시간20분이라 이틀 혹은 사흘에 걸쳐 소화하는 경우도 잦다. 하지만 지난 5월 베이징에서 여섯 곡을 하루에 시도한 뒤 용기를 낸 정경화는 광저우, 상하이에 이어 서울에서 생애 네 번째 전곡 연주를 소화했다.

오후 2시 정경화는 무대 뒤에 나타났다. 배우 강석우가 녹음한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바흐의 깊고 넓은 음악 속으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정경화가 외쳤다. "오케이! 나갑시다!"

정경화는 칠십 평생 겪은 삶의 희로애락이 자신의 활 끝을 얼마나 풍요롭게 채워줬는지 소리로 증명했다. 활이 현에 자국을 남길 때마다 울림통에선 세밀한 음표의 물결이 너울대고, 장대하게 겹쳐 올린 4성부가 터져 나왔다. 위기도 있었다. 소나타 2번을 켜던 중 음정이 아래로 기울고 순간 박자를 놓쳤다. 무대 뒤로 돌아온 정경화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할머니! 노망 났수?" 하며 깔깔 웃었다. 젊은 날의 정경화는 연주가 마음에 안 들면 벽에 머리를 쿵쿵 박고, 백스테이지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이날 정경화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냈는데 안 되면 할 수 없지"라며 송진에 활을 삭삭 문질렀다. 시간이 갈수록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세 시간의 연주를 끝내고 무대 뒤로 뛰어들었을 땐 "봤지? 그거 봤지? 마지막에 색채가 말도 못 하게 밝아. 선샤인이 들이치는 거 딱 전달했잖아, 하하!" 하며 흥분했다.

김남윤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는 "미쳤어. 언니니까 해낸다"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손주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분의 전곡 연주를 보니 감격스럽다"고 했다. 분장실에서 정경화는 왼손에 쥐가 내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래도 "내 나라에서 하는 게 제일 감미롭다"며 맥주로 목을 축였다. "내년까지 도쿄 산토리홀(1월 28일), 런던 바비칸센터(5월 10일), 뉴욕 카네기홀(5월 18일)에서 전곡을 한다"고 신나했다.

사인회 줄이 공연장 로비에 세 겹으로 섰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걱정 말아요. 마지막 분까지 다 해 드리고 원한다면 뽀뽀도 해 드릴 테니!" '바이올린을 든 마녀' 정경화가 아이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