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0.17 00:54
[김남윤, '현을 위한 세레나데'서 제자들과 故권혁주 추모 연주]
대한민국국제음악제 폐막 공연
당초 권혁주가 연주할 파트엔 정준수 경희대 교수 합류
김 교수, 무대 뒤에서 끝내 눈물
16일 오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전면에 대형 스크린이 걸렸다. 그 위로 지난 12일 새벽 부산에 연주하러 갔다가 택시에서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레 숨진 바이올리니스트 고(故) 권혁주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이 흘렀다. 자기 몸집만 한 바이올린을 쥐고 낑낑대며 활을 켜는 어린 혁주, 1993년 크리스마스 날 산타 모자를 쓰고 스승 김남윤(67)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의 무릎 위에 앉은 소년, "나는 무색무취한 연주보다 무겁고 강렬한 색깔이 좋다"며 연주하는 스물한 살 청년의 모습이 겹쳐 지나갔다. 열아홉에 칼 닐센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한 실력파 연주자였으나 짧은 생을 살다간 제자를 추억하기 위해 김 교수가 준비한 기록이다.
읊조리듯 토해내는 바이올린 선율 위로 "나한테 바이올린은 모든 것. 매일 바이올린과 싸우고 그러면서 정 드는 것 같다"고 했던 그의 말이 객석을 적셨다. 이윽고 김 교수와 선후배 연주자 셋, 그리고 지난 7월 김 교수가 한예종 출신 제자 10여명을 모아 재창단한 현악 앙상블 '코리안 솔로이스츠'가 나와 연주했다. 원래 권혁주가 함께하려 했던 비발디의 '네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단조'였다.

이날 김 교수는 나흘 전 제자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을 간직한 채 예정대로 제34회 대한민국국제음악제 폐막 공연인 '현을 위한 세레나데'에 섰다. 제자인 정준수 경희대 교수, 백주영 서울대 교수, 롱 티보 콩쿠르 우승자 신지아와 함께였다. 당초 권혁주가 제2파트를 소화할 계획이었지만 숨을 거두면서 김 교수의 첫 제자인 정 교수가 합류했다.
1974년 티보바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김 교수가 선생이 된 건 스물여덟 살 때인 1977년이었다. 경희대를 시작으로 서울대를 거쳐 1993년 한예종 개교 때부터 제자를 양성해 대학교수가 된 제자들만 해도 수두룩하다. 서울시향 부악장인 신아라와 클라라 주미 강, 열여섯 이수빈에 이어 지난해 한국인 첫 퀸 엘리자베스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자 임지영도 그가 길렀다. 그래서 한국 바이올린의 대모(代母)로 통하는 그가 제자들과 한 무대에 서는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이날은 여느 때와 달랐다. 서른하나, 그야말로 앞길 창창한 제자가 그리 허무하게 가버릴 줄은 40년간 제자 키우며 별의별 일 다 겪은 그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여섯 살 앳된 얼굴로 권혁주는 한예종 예비학교에 입학, 그에게 왔다. 2년간 가르침을 받으며 제자처럼, 아들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재주가 뛰어나 불과 아홉 살 때 러시아 모스크바로 유학 보낸 뒤에도 매일 같이 전화해 "밥은 먹었니" "춥지는 않니" 살갑게 챙겼다. 사망 당일 아침 여느 때처럼 전화해 "부산 공연 잘 마치고 리허설 때 보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제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김 교수의 기억 속 권혁주는 조용하지만 뜨거웠다. 어린 나이에도 계획한 시각이면 벌떡 일어나 연습에 몰두한 완벽주의자였다. 셈여림 기호, 이음줄 하나 지나치는 법 없이 악보에 충실한 연주는 권혁주의 장점이자 특징이었다. 과로를 염려할 만큼 밤낮 연주를 소화해 "몸부터 돌보라" 잔소리했지만 제자는 웃기만 했다. 지난달 중순 오른팔 고관절과 왼손 엄지 인대를 수술하고도 보름여 만에 무대에 복귀한 그를 보며 스승은 혀를 찼지만 한편으론 대견했다. 지난 5일 고인이 생전 마지막으로 섰던 무대에 함께했던 백주영 교수는 "모두가 빛나는 솔로만 하려 할 때 혁주씨는 바이올린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 '작은 거인'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권혁주는 이날 어디서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무대 뒤에서 김 교수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