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을지로에, 예술이 내려앉았다

  • 김미리 기자

입력 : 2016.10.11 03:00

[오늘의 세상]

한때 탱크도 만든다던 산업화의 땅, 어느새 예술가 둥지로

- 골목 사이로 50여곳 '날갯짓'
철공소·자재상·인쇄소 수천곳… 재료 많고 골목 자체가 작품 소재
외국인들 "뉴욕 브루클린 같다"
- 저렴한 임차료에 교통도 편해
지역 共生 모델 꿈꾸는 작가들 "알려지면 또 월세 올라" 걱정도

#1. 지난 7일 지하철 5호선 '을지로 4가'역 3번 출구로 나와 철물점, 공업사가 올망졸망 모인 산림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곱창처럼 복잡하게 꼬인 골목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커다랗게 만든 비둘기 모양 설치물 옆 건물에 작게 써 붙인 이름이 보인다.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유명 설치작가 양아치(46·본명 조성진)의 주도로 지난해 7월 재봉틀 공장이었던 건물을 작가 작업실 겸 전시장으로 바꾼 공간이다.

을지로 골목 재봉틀 공장이 예술가 작업실로 철물점, 공업사가 다닥다닥 모여 있는 서울 을지로 골목에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있다. 재봉틀 공장을 작업실 겸 전시장으로 바꾼‘슬로우 슬로우 퀵 퀵’에서 한 예술가가 음악을 틀고 있다. /고운호 객원기자
#2. 을지로 2가 롯데시티호텔 뒤편. 한때 인쇄소였던 5층짜리 낡은 건물은 '예술가 빌딩'이 됐다. 3층엔 디자인그룹 '옵티컬 레이스', 4층엔 영상작가 박경근과 작가 김현주, 5층엔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창욱이 입주해 있다. 건너편 욕실 자재상이 있는 3층짜리 벽돌 건물에도 예술가들이 산다. 이 지역 일대를 영상 작품 '청계천메들리'로 담았던 박경근 작가는 "해외 전시기획자들이 작업실에 종종 오는데 이런 곳이 있느냐며 흥미로워한다"며 "yBa (young British artists·1980년대 등장한 영국 현대미술 사조) 운동이 일었던 런던의 이스트엔드, 공장형 작업실이 많은 뉴욕의 브루클린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고매한 예술과는 대척점에 있을 법한 쇳가루 냄새 폴폴 나는 을지로가 예술가의 무대로 바뀌고 있다. 최근 2~3년 동안 을지로 2~4가 수표동, 입정동, 산림동 주변에 작가 작업실과 전시장 50여 곳이 들어섰다. 세운상가('개방회로' '빠빠빠 탐구소'), 대림상가('캐비닛 서울' '800/40'), 청계상가('200/20' '서울오픈미디어')처럼 이 지역 전자상가에도 예술가들이 속속 들어가고 있다.

(왼쪽 사진)을지로 작가들이 지난 7일 문화행사로 을지로 4가 산림동 골목에 설치한 비둘기 작품. 지금은 철거됐다. (오른쪽 사진)세운상가에 있는 전시 기획자 집단‘개방회로’작업실. 회로 기판 가게, 인쇄소와 이웃하고 있다.
(왼쪽 사진)을지로 작가들이 지난 7일 문화행사로 을지로 4가 산림동 골목에 설치한 비둘기 작품. 지금은 철거됐다. (오른쪽 사진)세운상가에 있는 전시 기획자 집단‘개방회로’작업실. 회로 기판 가게, 인쇄소와 이웃하고 있다. /고운호 객원기자·개방회로 제공
을지로 일대는 "탱크, 잠수함도 만들 수 있는 곳"으로 불릴 만큼 숙련공이 많다. 철공소, 자재상, 인쇄공장 수천 개가 모여 있어 설치미술의 경우, 그 자체가 거대한 작업실이다. 을지로 3가에서 4년간 작업실을 운영한 김아영 작가는 "작가치고 을지로에 재료 사러 안 와 본 작가는 없을 것"이라면서 "모터 가게, 인쇄소, 주물 가게, 유리 가게가 이웃이니 원스톱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작가들에겐 저렴한 임차료와 편리한 교통도 중요한 요소다. 박경근 작가는 15평 작업실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을 주고 쓰고 있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주고 5평짜리 작업실을 빌린 김현주 작가는 "이태원 우사단길에 있었는데 관광객이 몰려 임차료가 뛰고 번잡해져 을지로로 왔다"며 "재료도 쉽게 구하고 교통이 편해 좋다"고 했다.

을지로 일대 주요 작가 작업실·전시장
을지로는 '70년대의 테헤란로'였다. 1961~69년 입정동에 살았던 건축가 임형남씨는 "2000년대 테헤란로가 IT 시대를 열었다면, 1970년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을지로 일대 한옥을 허물고 공업사와 소형 공장이 들어섰다. 다시 세월이 흘러 작은 공장들이 쇠락하고 예술가들이 들어서고 있다"고 했다. 한때 우리 산업화의 군불을 지피던 엔진에서 지금은 제조업의 쇠락과 함께 슬럼화되고 있는 을지로 풍경이 예술의 좋은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양아치 작가가 동료 고산홍·김양우·김정화·윤여준 작가와 함께 운영하는 '슬로우 슬로우 퀵 퀵'처럼 서울시와 중구청의 지원을 받는 곳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지차체의 도시 재생 프로그램이 관에서 주도하고 예술가들이 끌려가는 모양새인 반면, 을지로의 경우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예술과 지역이 공생(共生)하는 문화 운동의 모델을 지자체에 제시해 지원을 받았다.

양아치 작가는 "지자체가 벌이는 문화 사업을 보면 '예술가'와 '지역 주민'을 억지로 중매결혼 시켜놓고 옥동자를 낳으라는 식이라 대개 결과가 좋지 않다"면서 "우리는 예술가들이 지역과 소개팅하듯 자연스럽게 서로 알아가는 모델을 실천하려 한다"고 했다. "예술가가 들어가 '미싱(재봉틀) 공장+α'를 만드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얘기다.

그는 최근 을지로 일대 작업실 40여 곳과 협력해 '비둘기 오디오&비디오 페스티벌'을 연 데 이어 조만간 '을지로 창작 포럼'을 열 계획이다.

벌써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돼 집값이 오르면서 원주민이 떠나는 현상)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을지로에서 문화 공간을 운영 중인 한 사진가는 "소문이 나면서 임차료가 스멀스멀 오르고 있다"며 "저렴한 곳을 찾아 여기까지 흘러온 작가들이 또 어딘가를 찾아서 가야 할 생각을 하면 관심이 달갑지만은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