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9.28 09:48

“한 곳에 있기 보다는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 것이 무용수로서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원원명(40)은 ‘무용 노마드(Nomad 유목민)’다. 한국 무용수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기 전인 2003년부터 외국을 떠돌아다녔다.
상주 단원을 두지 않는 프랑스 파리의 카롤린 칼송 무용단과 작업했으며 벨기에 브뤼셀의 빔 반데케이버스가 이끄는 울티마 베즈, 캐나다 몬트리올의 마리 쉬나르 무용단과도 호흡을 맞췄다.
무용단에 속한 직업 무용수로서의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다. 2007년부터는 직업 무용단원도 그만뒀다. 대신, 지인들과 소규모 프로젝트를 해왔다.
26일 강남의 호텔에서 만난 원원명은 “다른 문화를 접한다는 건 참으로 강력한 일 같아요. 사람을 만나고, 음식을 먹고, 여행을 다니고, 보고 듣고 자연환경까지 많은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죠. 개인적으로 여행이라는 것이 삶에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해요. 움직이는 거요”라고 말했다. 원원명은 28일 ‘2016 서울세계무용축제’(시댄스)의 하나로,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독무 ‘불타는(burning)’을 선보인다.
내한이 예정됐다 건강 악화로 한국을 찾지 못한 거장 안무가 카롤린 칼송(73)이 이끄는 카롤린 칼송 무용단 ‘단편들’ 중 하나다. 칼송이 원원명을 위해 안무한 작품으로 지난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문명과 산업화의 굴레를 벗어 던진 인간 본래의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담았다.
스웨덴에 살고 있는 원원명은 몇 년마다 한두 차례 한국에 들어온다. 하지만 무대 위에 서는 건 2005년 울티마 베즈의 ‘순수’(puur) 이후 무려 11년 만이다.
“오랜만에 한국 무대에 선다고 크게 특별한 건 없어요. 연습실이든 무대에서든 항상 긴장이 되거든요. 한국에 오면 좋은 건 친구, 가족, 은사님들을 만나는 거예요,”
2000년대 초 안무가 안성수가 이끄는 현대무용단 안성수 픽업 그룹과 작업을 준비하던 그가 전환점을 맞이한 건 2002년. 당시 나초 두아토가 예술감독으로 있던 스페인 국립무용단의 예술의전당 내한공연이 터닝포인트가 됐다.
당시 무용단 어시스턴스였던 에르베 팔리토(Hervé Palito)의 초대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3개월간 스페인 국립무용단에서 무용단의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 2003년 파리로 떠났다. 칼송의 창작공간이자 그 당시 무용 단체가 소속돼 있는 아틀리에 드 파리(Atelier de Paris)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부터 칼송에 매료된 그는 칼송을 꼭 만나고 싶었다.
칼송과 첫 작업은 2004년 6월 파리 카르투슈리에 소재한 아쿠아리움 극장(Théâtre de l’Aquarium Cartoucherie) 무대에 오른 칼송의 당시 신작 ‘찻집의 호랑이들’(Tigers in the tea House). 이후 칼송과 프로젝트를 구상했으나 성사가 쉽지 않았다. 이후 ‘불타는’으로 두 사람의 작업이 마침내 성사된 것이다.
원원명은 칼송의 예술적인 면은 바다, 인간적인 면은 산에 비유했다. “젊은 친구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하고 거침없는 창작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어요. 또 동양적인 미를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정서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끈임 없이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는 열정이 좋아요.”
원원명은 본래 대학로를 오가며 연극과 뮤지컬을 꿈꿨다. 그러던 중 발레, 재즈무용, 현대무용을 자연스럽게 접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 흥미를 느껴 서울예대 현대무용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현대무용실기과를 나왔다.
한동안 한국 무용계에 몸담고 있지 않았던 그는 그간 현대무용이 활성화됐다고 봤다. 하지만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몇몇 무용수 또는 작품에만 쏠리는 대중매체 등의 환경은 아쉽다고 지적했다.
“대중매체 힘이 크잖아요. 이름이 안 알려진 무용인들의 몸짓도 중요하다고 봐요. 다양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성과 내는데 몰두하다 보니 젊은 친구들이 빨리 소비가 되고요.”
원원명은 10월 4~7일 서울 서대문구 서울무용센터에서 여는 인텐시브 워크숍 ‘하모니어스 맨(Harmonious Man)’을 통해 젊은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다양한 길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는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같이 움직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서로 잘 놀다, 잘 어울리고 갔으면 합니다. 실험적이고 공동체적 춤의 접근방식을 중시하거든요.”
원원명이 무용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진 건 2007년부터 2014년까지. “힘들기 보다는 소비가 되기 싫었다”는 마음이다. 말(馬) 좋아하던 그는 그동안 말농장 등을 다니며 장제사(裝蹄師)에 대한 꿈을 품게 됐다. 편자와 관련된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능공이다. 원원명이 스웨덴에 머물게 된 까닭도 말에 대해서는 선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장제사 학교도 알아보고 했어요. 한 10년은 더 걸리겠더라고요. 그러면 제 나이는 쉰살. 하하.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장제사가 말의 편자를 갈아주는 모습이 꼭 춤 추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도 마음에 들어요. 제가 좋아하는 말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춤을 추는 듯하죠.”
원원명은 자신이 무용수이고 무용을 좋아하지만, 무용만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무용하는 사람들 만나면, 대화 내용이 무용밖에 없어요. 춤만 가지고 해결되지 않은 경우가 있거든요. 좀 더 반경을 넓힐 필요가 있죠. 지금 젊은 친구들을 보면, 자기 표현력, 기술력, 정보 습득력 등이 다 좋은데 춤에는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무엇이 있거든요.”
원원명(40)은 ‘무용 노마드(Nomad 유목민)’다. 한국 무용수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기 전인 2003년부터 외국을 떠돌아다녔다.
상주 단원을 두지 않는 프랑스 파리의 카롤린 칼송 무용단과 작업했으며 벨기에 브뤼셀의 빔 반데케이버스가 이끄는 울티마 베즈, 캐나다 몬트리올의 마리 쉬나르 무용단과도 호흡을 맞췄다.
무용단에 속한 직업 무용수로서의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다. 2007년부터는 직업 무용단원도 그만뒀다. 대신, 지인들과 소규모 프로젝트를 해왔다.
26일 강남의 호텔에서 만난 원원명은 “다른 문화를 접한다는 건 참으로 강력한 일 같아요. 사람을 만나고, 음식을 먹고, 여행을 다니고, 보고 듣고 자연환경까지 많은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죠. 개인적으로 여행이라는 것이 삶에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해요. 움직이는 거요”라고 말했다. 원원명은 28일 ‘2016 서울세계무용축제’(시댄스)의 하나로,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독무 ‘불타는(burning)’을 선보인다.
내한이 예정됐다 건강 악화로 한국을 찾지 못한 거장 안무가 카롤린 칼송(73)이 이끄는 카롤린 칼송 무용단 ‘단편들’ 중 하나다. 칼송이 원원명을 위해 안무한 작품으로 지난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문명과 산업화의 굴레를 벗어 던진 인간 본래의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담았다.
스웨덴에 살고 있는 원원명은 몇 년마다 한두 차례 한국에 들어온다. 하지만 무대 위에 서는 건 2005년 울티마 베즈의 ‘순수’(puur) 이후 무려 11년 만이다.
“오랜만에 한국 무대에 선다고 크게 특별한 건 없어요. 연습실이든 무대에서든 항상 긴장이 되거든요. 한국에 오면 좋은 건 친구, 가족, 은사님들을 만나는 거예요,”
2000년대 초 안무가 안성수가 이끄는 현대무용단 안성수 픽업 그룹과 작업을 준비하던 그가 전환점을 맞이한 건 2002년. 당시 나초 두아토가 예술감독으로 있던 스페인 국립무용단의 예술의전당 내한공연이 터닝포인트가 됐다.
당시 무용단 어시스턴스였던 에르베 팔리토(Hervé Palito)의 초대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3개월간 스페인 국립무용단에서 무용단의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 2003년 파리로 떠났다. 칼송의 창작공간이자 그 당시 무용 단체가 소속돼 있는 아틀리에 드 파리(Atelier de Paris)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부터 칼송에 매료된 그는 칼송을 꼭 만나고 싶었다.
칼송과 첫 작업은 2004년 6월 파리 카르투슈리에 소재한 아쿠아리움 극장(Théâtre de l’Aquarium Cartoucherie) 무대에 오른 칼송의 당시 신작 ‘찻집의 호랑이들’(Tigers in the tea House). 이후 칼송과 프로젝트를 구상했으나 성사가 쉽지 않았다. 이후 ‘불타는’으로 두 사람의 작업이 마침내 성사된 것이다.
원원명은 칼송의 예술적인 면은 바다, 인간적인 면은 산에 비유했다. “젊은 친구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하고 거침없는 창작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어요. 또 동양적인 미를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정서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끈임 없이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는 열정이 좋아요.”
원원명은 본래 대학로를 오가며 연극과 뮤지컬을 꿈꿨다. 그러던 중 발레, 재즈무용, 현대무용을 자연스럽게 접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 흥미를 느껴 서울예대 현대무용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현대무용실기과를 나왔다.
한동안 한국 무용계에 몸담고 있지 않았던 그는 그간 현대무용이 활성화됐다고 봤다. 하지만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몇몇 무용수 또는 작품에만 쏠리는 대중매체 등의 환경은 아쉽다고 지적했다.
“대중매체 힘이 크잖아요. 이름이 안 알려진 무용인들의 몸짓도 중요하다고 봐요. 다양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성과 내는데 몰두하다 보니 젊은 친구들이 빨리 소비가 되고요.”
원원명은 10월 4~7일 서울 서대문구 서울무용센터에서 여는 인텐시브 워크숍 ‘하모니어스 맨(Harmonious Man)’을 통해 젊은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다양한 길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는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같이 움직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서로 잘 놀다, 잘 어울리고 갔으면 합니다. 실험적이고 공동체적 춤의 접근방식을 중시하거든요.”
원원명이 무용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진 건 2007년부터 2014년까지. “힘들기 보다는 소비가 되기 싫었다”는 마음이다. 말(馬) 좋아하던 그는 그동안 말농장 등을 다니며 장제사(裝蹄師)에 대한 꿈을 품게 됐다. 편자와 관련된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능공이다. 원원명이 스웨덴에 머물게 된 까닭도 말에 대해서는 선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장제사 학교도 알아보고 했어요. 한 10년은 더 걸리겠더라고요. 그러면 제 나이는 쉰살. 하하.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장제사가 말의 편자를 갈아주는 모습이 꼭 춤 추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도 마음에 들어요. 제가 좋아하는 말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춤을 추는 듯하죠.”
원원명은 자신이 무용수이고 무용을 좋아하지만, 무용만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무용하는 사람들 만나면, 대화 내용이 무용밖에 없어요. 춤만 가지고 해결되지 않은 경우가 있거든요. 좀 더 반경을 넓힐 필요가 있죠. 지금 젊은 친구들을 보면, 자기 표현력, 기술력, 정보 습득력 등이 다 좋은데 춤에는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무엇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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