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시대부터 우린 작곡가의 충실한 매니저"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6.08.22 01:07

英 악보 출판사 '부지 앤 호크스' 제니스 주스킨드 대표
작곡가 진은숙과도 22년째 계약… 악보 출판권·저작권 독점 관리

"어둠 속에 태어난 우리, 빛의 부재 속에 태어난 결과인 우리가/ 어찌 세상의 진실을 알 수 있겠는가?"(2악장 '빛의 찬가' 중에서)

지난 19일 롯데콘서트홀 개관공연에서 단연 눈길 끈 주인공은 작곡가 진은숙이 대중에 처음 공개한 관현악곡 '별들의 아이들의 노래'였다. 연주 시간만 40분에 이르는 대작(大作). 17세기 영국 시인 헨리 본부터 20세기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까지 자연 현상과 신의 섭리에 대해 쓴 시들을 바탕으로 오케스트라와 오르간, 합창까지 아우른 곡은 신비로웠다. 초반 '진은숙호(號)'에 탑승한 청중을 끝 모를 심연으로 이끈 음악은 이윽고 먼 데서 들리는 장엄한 울림으로 콘서트홀을 뒤덮었다. 거대한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국의 악보 출판사인 '부지 앤 호크스' 대표 제니스 주스킨드(64) 역시 이날 객석에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부지는 진은숙과 20년 넘게 독점 계약을 맺고 있는 세계 최대 음악 출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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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열린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 개관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작곡가 진은숙의‘별들의 아이들의 노래’를 세계에서 처음 선보이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베토벤 시대부터 출판사는 작곡가를 대신해 악보 독점 출판권과 저작권 관리를 맡아왔다. 음악가들은 연주회마다 '렌털'이란 방식으로 악보를 돈 내고 쓴다. 부지는 여러 음악 출판사 중에서도 근현대 작곡가들 작품을 대거 관리한다. 베토벤·브람스는 저작권이 소멸했으나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번스타인, 벤저민 브리튼 등과 엘리엇 카터, 스티브 라이히 등이 부지 소속이다. 진은숙이 부지와 인연을 맺은 건 지난 1994년. 작곡가 조지 벤저민이 런던에서 진은숙의 '말의 유희'를 지휘한 직후였다. "'판타스틱하다'는 신문 리뷰를 읽고 들어봤는데 이전의 어떤 곡과도 비슷한 데가 없어 당장 계약했어요. 작곡가와 독점 계약해서 출판하는 걸 '매리지(marriage)'라고 해요. 그녀와 결혼한 지 벌써 22년 됐네요(웃음)."

출판사는 전속 작곡가가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게 지원한다. 작곡가에게 저작권을 양도받은 저작권자로서 출판, 녹음, 영화음악, 휴대폰 벨소리, 게임 배경음악 등으로 저작물 이용·개발에 힘쓴다. 그래서 주스킨드 대표는 자신을 "작곡가의 충실한 매니저"라 표현했다.

진은숙과 계약한 영국의 악보 전문 출판사 부지 앤 호크스의 제니스 주스킨드 대표.
진은숙과 계약한 영국의 악보 전문 출판사 부지 앤 호크스의 제니스 주스킨드 대표. /고운호 객원기자
수천 년을 살아남은 종이책조차 전자책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존립 위협을 받고 있는 오늘날, 종이로 클래식 악보를 펴내는 일이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이 될 수 있을까. 주스킨드 대표는 "당연히 된다. 수백만 파운드 수익을 내는 사업"이라고 자신했다. "음악은 여전히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전업 연주자는 계속 늘어요. 악보라 하면 종이를 떠올리던 기존 관념도 디지털과 전자악보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어요. 젊은 사람들의 음악 취향 또한 과거에 비해 장르가 다양해졌고요."

해마다 부지에 짭짤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작곡가 '톱5'는 대개 스트라빈스키가 1순위다. 그 뒤를 벤저민 브리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프로코피예프, 라흐마니노프가 잇는다.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지금도 제일 잘나가는 베스트셀러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으로 꼽히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저작권은 지난 2014년 만료됐다. 주스킨드 대표는 "악보란 후대 음악가들한테 작곡가의 심중을 정확히 찾아들어 갈 수 있게 알려주는 '지도'라고 생각한다"며 "수많은 음표와 음률을 모아 먼 미래까지 보관하고 전해줄 수 있는 도서관과 같기에 우리는 앞으로도 꾸준히 악보를 펴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