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펼쳐지다, 어려운 길만 걸어온 巨人의 인생극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6.08.04 01:31

이해랑 탄생 100주년 기념
60년대 '이동극장 운동' 일지 등 자료 더 찾아내 새 평전 출간
6·25전쟁 중 햄릿 전막 첫 공연 "예술철학 확립한 드문 연극인"

"이거 봐, 내 이번이 마지막이야, 내가 더 못 해!"

1989년 초, 당대의 톱스타 유인촌이 '너무 바빠서 이번에는 도저히 출연이 어렵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설 때, 연출가 이해랑(李海浪·1916~1989) 선생이 그렇게 애소(哀訴)하듯 연극 '햄릿'의 주인공을 맡아달라고 청했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유인촌은 다른 일정을 미루고 '햄릿'에 출연했는데, 개막을 일주일 앞두고 이 선생은 과로로 쓰러져 영면했다. 27년이 지난 올해, 예순다섯 유인촌이 이해랑 탄생 100주년 기념 연극 '햄릿'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 데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어려운 길만 걸어"

국내 최고의 연극상인 이해랑연극상의 역대 수상자 9명이 출연한 연극 '햄릿' 공연과 함께 이해랑 선생의 평전이 재출간됐다. 유민영 서울예대 석좌교수가 쓴 '한국 연극의 거인(巨人) 이해랑'(태학사)이다. 10주기 때인 1999년 출간된 '이해랑 평전'을 증보한 이 책은 5장 분량을 9장(770쪽)으로 대폭 늘렸다. 유민영 교수는 "1960년대 이 선생이 전국을 순회하며 연극 공연을 벌인 '이동극장 운동' 당시의 일지 등 귀중한 사료를 많이 찾아내 집필에 반영했다"고 말했다.

한국 연극의 리얼리즘을 확립한 연극 연출가 이해랑. 예총 회장과 국회의원 등을 지내며 공연 예술을 천시하는 분위기를 혁파하고 예술인 복지의 큰 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연극의 리얼리즘을 확립한 연극 연출가 이해랑. 예총 회장과 국회의원 등을 지내며 공연 예술을 천시하는 분위기를 혁파하고 예술인 복지의 큰 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 교수는 이해랑 선생에 대해 "자신 앞에 닥친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중에서 처음부터 일관되게 어려운 길을 택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조선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후손인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연극이라는 신세계를 접한 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길을 개척했다.

광복 이후 좌익 연극인들이 활개치는 상황이 되자 이론전과 공연을 통해 그들과 정면으로 맞섰다. "연극은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어떤 주의(主義)나 주장의 종속물이 돼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국립극장 전속단체 신협을 이끌게 된 그는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햄릿'의 전막 공연을 국내 최초로 올리는 등 연극사의 맥을 이었다. 1953년 예술원 창립 당시 문화계 인사들의 투표로 회원을 선정했는데, 30대였던 이해랑은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초대 회원이 됐다.

"공연 문화 천시 분위기 무너뜨려"

유 교수는 "이해랑 선생이 예술철학을 확립한 드문 연극인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195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의 리얼리즘(사실주의)은 서구 근대극의 껍데기 흉내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가 본격적으로 연출 활동에 나서 '밤으로의 긴 여로' '뇌우' 등을 내놓으면서 그런 비판은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배우나 연출자로 살면서도 스캔들 한번 없었던 도덕성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이해랑 선생이 예총 회장에 당선된 데 이어 1971년부터 두 차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전국구·유정회)을 지낸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유 교수는 "그의 정계 진출로 인해 한국 문화계에서 두 가지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첫째, 공연 문화를 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혁파했고, 둘째, 예술인마을을 세우고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에 나서는 등 예술인을 위한 거대한 시스템을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