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잡종, '제2의 베토벤' 꿈꾸다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6.07.29 00:41

[英 로열 필 소사이어티가 뽑은 '올해의 작곡가'에 선정된 신동훈]

진은숙에게 일대일 작곡 강습
어릴 때 헤비메탈·재즈 등 듣고 고등학교 록밴드서 건반 맡기도
"곡 쓸 땐 가위눌리고 힘들지만 작곡 안 하는 난 상상이 안 돼"

"오선지에 음표를 그려넣는 제 모습이 뿌듯하면서도 불행해 보일 때가 있어요. 작곡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인간인지 보는 과정이죠."

십수 년 뒤, 서울시향 상임작곡가 진은숙처럼 세계 음악계를 주름잡을 국내 클래식 작곡가가 탄생했다. 신동훈(33)씨다. 지난 22일(현지 시각) 영국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RPS)가 뽑는 '올해의 작곡가(Composition Prize)'에 최종 선정됐다. 1813년 설립된 RPS는 베토벤·멘델스존·드보르자크·엘가 등 쟁쟁한 작곡가들한테 곡을 써달라고 요청해 명곡을 수두룩하게 뽑아냈다. 베토벤은 교향곡 5번·7번을 RPS 오케스트라 연주로 초연했다. 1822년 RPS가 50파운드를 주고 위촉한 작품이 바로 교향곡 9번 '합창'이다.

2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신동훈씨를 만났다.
2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신동훈씨를 만났다. 런던의 월세 100만원짜리 원룸에 사는 그는 부엌 옆 거실을 작업실로 쓴다고 했다. 귀마개를 끼는 순간, 온갖 잡동사니가 구르는 공간은 그만의‘우주’가 된다. /장련성 객원기자
신씨는 이번 수상자 6인 가운데서도 최고 성적이다. 상금 3000유로와 정상급 교향악단인 필하모니아에 곡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서울대 작곡과를 나와 2007년 서울시향 진은숙에게 일대일 강습을 받았고, 2009년 스페인 국제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3년 뒤 헝가리 출신 작곡가 페테르 외트뵈시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작품 '팝업'을 초연하면서 본격 작곡 여정에 들어섰다.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만난 신씨는 "운이 좋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런던 심포니에서 3분짜리 곡을 위촉받아 작업하고 있었고, 작년엔 정상급 현대음악 단체인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과 신작 연주까지 마쳤어요." 클래식 작품은 화성법, 대위법, 각 악기의 음역과 성격 등을 꿰뚫지 않으면 애당초 쓸 수가 없다. 수학적 사고를 발휘해 설계도면을 그리고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건축물을 지어 올리는 것과 비슷하지만 정작 음표로 지은 집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애써 작곡해도 연주자가 연주해주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 된다. "곡 쓸 땐 정신적 압박이 엄청나요. 가위눌리고, 쫓기는 꿈 맨날 꾸고, 끊었던 담배를 막 피우고 싶어져요." 그럼에도 자석에 이끌리듯 힘든 작업을 또 하게 되는 이유는 "작곡 안 하는 나는 전혀 상상이 안 돼서"다. "아주 가끔 흐뭇할 때가 있거든요(웃음)."

또래 클래식 음악가들이 클리셰처럼 내뱉는 어린 시절이 그에겐 없다. 카이스트를 졸업한 뒤 1세대 공업용 로봇을 설계한 부친은 아들이 어릴 때부터 '신중현과 엽전들',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 광란적 헤비메탈, ECM 레이블 재즈 등을 잡식으로 빨아들이게 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하드록과 관현악곡, 타령조가 섞인 바이올린 주법 등 '음악적 잡종'특질이 두드러진다. "고등학교 땐 록 밴드에서 노래와 건반을 맡았어요. 민요에서 왈츠, 천박한 가요, 고상한 합창까지 이것저것 섞어놓은 말러도 좋아했죠. 유랑했던 그 흔적들이 남들보다 좀 더 자유롭게 음악을 만드는 것 같아요."

존경하는 예술가도 음악가가 아니라 아르헨티나 소설가 보르헤스다. "문장은 평범한데 내러티브와 구조는 신선하잖아요." 신씨는 "현대음악은 어렵지만 나와 동료들이 고군분투하며 작곡하는 이유는 큰 강줄기 속에서 옥석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자꾸 만들고 자주 들을 수 있어야 새로운 베토벤, 더 나은 모차르트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