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떠난 戰友들에게 '월광' 소나타 바칩니다"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6.06.28 23:34

피아니스트이자 참전 용사인 세이모어 번스타인, 6·25 참전용사 감사 만찬 연주

"어제 국립묘지와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어요. 내 마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찼어요. 베토벤이 '월광' 소나타 1악장을 작곡할 때 세상의 모든 슬픔을 이 한 곡에 담았다고 합니다. 자유를 위해 총 들고 싸웠지만 먼저 저세상으로 가서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없는 전우들을 위해 이 곡을 바치고 싶어요."

지난 27일 저녁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89)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지난 4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주인공이기도 한 번스타인은 1951년 4월 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으로 파병돼 이듬해 11월 전역할 때까지 총성이 울리는 전선에서 100여 차례 음악을 연주하며 군인들을 위로한 참전 용사. 국가보훈처가 6·25에 참전한 미국 용사들과 그 가족들을 초청해 연 감사 만찬에서 연주에 나섰다.

2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6·25 참전용사 감사 만찬에서 전우들을 위해 64년 만에 리사이틀을 연 세이모어 번스타인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2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6·25 참전용사 감사 만찬에서 전우들을 위해 64년 만에 리사이틀을 연 세이모어 번스타인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뉴시스
총알 들이치는 사선, 그 죽음의 땅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을 위해 피아노를 쳤던 청년 세이모어는 64년 만에 눈빛 깊은 노인의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와 전우들 앞에서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담은 영상을 보며 즐거워하던 참석자들은 먼저 간 전우들을 그리며 숙연해졌다. 부드럽고 시적인 분위기 사이로 비탄과 흐느낌을 미묘하게 섞은 그의 연주는 고요한 달빛처럼, 일렁이는 물결처럼 잔잔하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어진 연주는 브람스의 인터메조 A장조였다. 번스타인은 "'월광' 소나타와는 반대로 브람스는 가볍고 사랑스럽고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이 곡을 작곡했다"며 "6·25의 끔찍한 광경에서 살아남은 우리가 이제 해야 하는 것은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삶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참혹한 상흔을 딛고 오늘날 눈부신 번영을 일궈낸 한국민들을 위해 이 곡을 바친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노(老) 피아니스트의 혼신을 다한 연주에 만찬장은 쥐죽은 듯 고요에 빠져들었다.

이날 만찬에는 마크 리퍼트 주한 미 대사와 주한미군 관계자, 박승춘 국가보훈처장과 보훈단체 관계자 등 190여명도 함께했다. 번스타인을 비롯한 참전 용사들은 이날 만찬을 끝으로 5박 6일간 방한 일정을 마치고 28일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