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巨匠, 한국 오페라 제자와 함께한 8일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6.05.31 03:00

[29일 막 내린 '무티 아카데미'에서 韓 젊은 음악도 지도한 지휘자 무티]

지휘·성악·오페라 세 분야 훈련
음정, 쉼표 하나까지 정확히 강조… 마음에 안들땐 "그만!" 외치기도
무티 "韓 오페라, 초기 단계지만 좋은 성악가 많아 기대 크다"

뼛속까지 이탈리아 피가 흘러서 한국에 와도 지중해 음식만 고집할 거라 했다. 입맛조차 까다로운 그의 이름은 리카르도 무티(75). 음악을 좋아했던 의사 아버지는 셋째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했는데, 열다섯 중학생이던 리카르도가 재능을 꽃피운 쪽은 피아노였다. 토스카니니의 후계자였던 안토니노 보토(1896~1985) 밑에서 작곡과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배운 무티는 1986년부터 18년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음악감독으로 활약하며 오페라 종주국의 명성을 높였다.

이 시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로 손꼽히는 무티가 22일부터 여드레 동안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무티 아카데미'를 열어 "아주 오래전 이탈리아에서 가르치던 방식"으로 지휘, 성악, 오페라 코치 세 분야에서 젊은 음악도 15인을 훈련시켰다. 무티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2007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투어를 다닐 때의 무티.
소식(小食), 말끔한 옷차림, 아무리 피곤해도 정확히 지키는 약속 시각. 한국에 머문 10여일 동안 리카르도 무티는 자기 관리의‘달인’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2007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투어를 다닐 때의 무티. /크레디아 제공
지난 22일 오후 4시, 무티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단어와 음정, 쉼표 하나의 길이 등 사소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지키라고 강조하며 하나씩 고쳐나갔다. 그러다 마음에 안 들면 발을 탕 구르며 "그만!"을 외쳤다. "지금 얼마나 엉망으로 하는지 그간 아무도 당신에게 말해준 적이 없나요?" 당대의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가 "성악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연출도 휘어잡는 독재자"라고 치를 떨었던 '카리스마의 제왕'다웠다.

지휘 참가자들을 향해서는 "불필요한 몸짓을 삼가라"고 주문했다. "왼손을 (지휘봉을 쥔) 오른손과 똑같이 움직이거나 지나치게 많이 쓰면 안 돼요. 왼손은 많은 것을 표현해내지만 아주 작은 동작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지휘 참가자 데이비드 리(28)는 말했다. "무대 위 성악가들이 어떤 감정을 연기하고 있는지 악보에 다 쓰여 있진 않거든요. 하지만 지휘자는 그것까지 꿰뚫고 있어서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있는 연주자들에게도 그 내용을 전달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만 악기 선율도 성악가와 똑같은 감정을 낼 수 있다고 하셨어요."

지난 25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에서 성악 참가자인 바리톤 최기돈에게 조언하고 있는 무티.
지난 25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에서 성악 참가자인 바리톤 최기돈에게 조언하고 있는 무티. /경기도문화의전당 제공
지난해 여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무티는 오페라 '에르나니'에 이탈리아로 유학 가 이렇다 할 경력이 없던 소프라노 여지원을 주역으로 전격 발탁했다. 이탈리아에서 연 아카데미에서는 지휘 참가자 중 최고 점수를 받은 독일계 일본인 에리나 야시마를 자신이 상임으로 있는 시카고 심포니의 보조 지휘자로 임명했다. 한번 실력을 인정한 제자한테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 무티인 만큼 이번 아카데미에선 어느 참가자가 그의 눈에 들었는지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소프라노 홍주영(35)은 "영원히 깨지 않을 꿈이길 바랐다"고 했다. "학교 졸업하고 프로 연주자로 무대에 서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잘한다' 칭찬뿐 깊이 있는 조언을 들을 기회는 드물어요." 바짝 목말라 있던 그녀에게 지난 8일은 너무 짧았다. "엄청난 영광이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눈앞에 있는데 맛만 본 느낌…." 홍주영은 "참가자들이 말귀를 잘 못 알아들으면 포기하고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는데 무티는 끝까지 정확하게 가르쳐주려고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

꿈은 끝났다. 경기도문화의전당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이번 아카데미를 통해 이 사나이가 우리 오페라계에 남긴 발자취는 얼마나 깊을까. 8일간 일반 관객 1000여명이 객석에서 무티가 지도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다. 지난 27일 예술의전당에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슈베르트 교향곡 4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한 공연은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고유 악기'임을 여실히 증명한 호연(好演)이었다. 우리 오페라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점검한 기회이기도 했다. 무티는 "한국 오페라는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좋은 악기(성악가)가 많아 기대가 크다"고 했다.

지난 29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에서 열린 '경기 무티 아카데미 콘서트'에선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주요 아리아를 아카데미에서 배운 성악가 12명이 나눠 불렀다. 특히 오케스트라와 성악가·지휘자의 삼위일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긴밀한 호흡, 숨소리에서도 묻어나는 희로애락이 일품이었다. 오페라가 왜 400년 넘게 종합예술의 극치로 인정받는지 보여준 무대였다.